윤정이와 피아노.jpg

 

배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정도는 아이마다 다르다.

그런면에서 둘째이자 첫 딸인 윤정이는 또래보다 빨랐다.

18개월때부터 또렷하게 말 했던 윤정이는 24개월때 유모차를 타고 있던 저를 보고

어떤 아이가 '엄마, 아기가 있어' 라고 하자

'나는 아기 아닌데.. 윤정인데'라고 말 하는 깜찍한 자의식을 보여 주었던 아이였다.

 

그림도, 무용도 잘 했다. 숫자에 대한 감각도 오빠보다 앞섰다.

세 아이 중에 가장 엄친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던 윤정이였지만

무럭 무럭 솟아나는 이 아이의 호기심과 의욕에 나는 제대로 부응해주지 못했다.

마악 초등학교에 입학한 오빠가 있었고, 어린 동생도 있었기 때문이다.

윤정이는 많은 시간을 저 혼자 놀거나, 오빠가 읽는 책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보거나

아니면 글은 모르지만 그림으로 이해하며 책을 읽는 것으로 보냈다.

글을 너무 배우고 싶어 했는데 내가 잘 가르칠 수 가 없어 학습지를 고려해 보기도 했지만

마을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씩만 들어오는 우리 동네는 학습지 회사들조차 서비스를

안 하는 곳이어서 포기했다. 

 

지난해 봄에 벼르고 벼르던 피아노를 집에 들여 놓은 후에

윤정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30여년 전에 체르니30번을 조금 배우다 그만 둔 내 실력으로 기초 정도는

가르칠 수 있었지만 두 돐 지나면서 부터 낮잠을 자지 않는 막내는

언니가 피아노 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 제가 원하는 만큼

배울 수 없는 스트레스에 윤정이는 오래 속상해 하곤 했다.

 

내게 배운 젓가락 행진곡을 아무때나 신나게 두들겨대며 치곤 하는 필규는

윤정이와 함께 개인 레슨을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내 말에 '싫어요!'한 마디로

거절했다. 교통이 불편한 우리집에 피아노 선생님을 모시려면 필규까지 같이

레슨을 해야 했지만 필규는 레슨엔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면 배우게 해줄께.. 라는 말로 윤정이를 위로하고 있었는데

올해들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변화가 생겼다.

필규가 레슨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집에 놀러오는 제 동기 여자애들이 멋들어진 곡을 맘대로 치는 모습을 보고

필규는 자극을 받았다. 저도 그 곡을 쳐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필규가 나서니 레슨은 금방 진행이 되었다. 마침 공동육아 어린이집

교사 경력이 있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주 잘 다루는 선생님이 계셨다.

매주 금요일 세시부터 다섯시까지 필규와 윤정이 레슨을 하고

전철역까지는 내가 태워다 드리는 조건으로 레슨이 성사 되었다. 

 

구정이 지난 금요일, 첫 레슨이 있었다.

윤정이는 방을 말끔히 치우고, 이쁜 옷을 골라입고 아침부터 레슨시간만 기다렸다.

오후 세시 무렵이 되자 마을버스가 서는 삼거리까지 나가서 선생님을 맞이하겠다고 졸랐다.

아이들은 마당에 나가 선생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기다렸다가 선생님이 보이자

신이 나서 마당을 뛰어 다녔다.

마침내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첫 수업을 위해 피아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을때

내가 다 벅차고 설레어 집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말소리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는

윤정이의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40여분의 첫 수업을 마친 후 윤정이는 환한 얼굴로 뛰어 나왔다.

'너무 재미있어요!' 눈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철역까지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며 이야기를 들어 봤더니 윤정이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나 열심히 집중하고 정성을 다 해서 듣든다는 것이었다.

일곱살이 되도록 유치원도 안 다녔던 윤정이는 제가 원하는 배움에 저 만을 위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다.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할지, 얼마나 기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피아노 선생님은 윤정이 인생에 첫 스승인 것이다.

 

어린이집, 유치원시절 부터 수십명의 친구들과 함께 입학을 하고 수업을 하는

경험을 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렸을때부터 영어학원이니, 음악학원이니 하는 기관들을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피아노를 배우는 일이 대단할 리 없다.

윤정이는 다르다.

오래 오래 기다려왔고 고대해 왔던 배움이다. 처음으로 저 만을 위해 제게 오는 선생님을'

만나고 제가 원하던 배움을 얻는 시간이다. 얼마나 기쁘게 그 시간을 누리는지

선생님도 나도 깜짝 놀라고 있다.

 

금요일만 되면 아침부터 '언제 세시가 되요?' 묻는 윤정이다.

30분에 한번씩 내게 와서 시간을 묻고 간다. 방을 정리하고 이쁜 옷을 입고 시계만 바라본다.

오후가 되면 창가에 매달려서 마당만 보고 있다가 선생님 모습이 골목 어귀에서 보이면

마당까지 달려나가 선생님을 맞이한다.

 

'윤정이는 무슨 말을 해도 눈이 반짝 반짝 거려요. 얼마나 열심히 듣는지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로요. 손가락 모양도 이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가르쳐 주는 건 다 따라하구요'

 

알 수 있다. 윤정이가  얼마만큼의 정성과 애정으로 피아노을 배우고 있는지..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충분이 충분히 제 안에 고여서 넘쳐날 만큼 간절해 졌을때

시작하게 된 배움이 아이를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새로운 경험속으로 이끌고 있는지

매 주 경험하고 있다.

 

그렇구나.

정말 정말 간절할때, 절실하고 목마를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난다.

요즘의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 간절함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어릴때부터 숨이 막히도록

주어지는 인공적인 배움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먼저 계획하고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주는 배움이란 아이를 진정한  즐거움으로 이끌어주기 어렵다.

하나를 제대로 배워서 제것으로 하기도 전에 또 다른 배움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란

어느것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배움의 진짜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지겹고, 싫고, 재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세상속에 아이들은 살고 있다.

 

원하는 배움이 있다면 충분히 열망하게 하자.

얼마나 간절하고 열렬하게 바라는지 제 안에 그 배움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자. 한꺼번에 배우게 하지 말고 한 가지라도 그 안의 기쁨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배우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윤정이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동네 자치센터에 나가 발레를 배우고, 매 주 금요일마다 집에 찾아 오는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전부다. 그 외의 시간은 동생과 엄마와 오빠와 놀고

책을 보고, 동네를 산책하고, 집안 일도 돕는다.

내년에 들어갈 학교에 대한 큰 기대와 설레임을 품고 하루 하루 즐겁게 보내고 있다.

 

한번도 큰 기관에 다녀본 일이 없으므로 윤정이는 학교를 아주 아주 소망하고 있다.

그 소망처럼 학교 생활이 즐거울지 아닐지 모르지만 동경과 바램으로 입학을

기다리는 마음이면 새 생활을 열심히 사랑하며 지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래 기다려온 일에서 얻는 기쁨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어릴때부터 지나치게 많은 배움속에 빠져 사는 아이들이 많다.

어느것 하나도 진정한 배움이 되지 못하고, 너무 빨리 배우는 일에 지쳐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포처럼 아이에게 쏟아 붇는 투자가 아니라

작은 것 하나에도 제 안의 열망이 자곡차곡 쌓일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매 주 금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곱살 딸 아이의 모습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배움을 본다.

그 모습에서 나도 다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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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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