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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만든 미니 생크림케잌. 부모자식 사이에도 때로는 음식이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요즘 딸이 변했다.

시키지 않아도 자기 할 일을 차분하게 잘 찾아서 하던 딸이,

아이를 10년 키우면 저렇게 멋있어지나 싶을 만큼 믿음직스럽던 딸이,

4학년을 코앞에 두더니 엄마인 나와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린 동생을 너무 잘 데리고 놀다가도 갑자기 귀찮아하며 울리질 않나

기분이 엄청 좋은 것 같더니 금새 사소한 일로 토라져서 화를 내거나..

나와 같이 쇼핑을 갈 때도 처음엔 자매지간처럼 알콩달콩 룰루랄라 손잡고 걷다가

어느샌가 딸은 불평불만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나는 또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새침해져서 자기만의 세계로 등을 돌린 딸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연애할 때 남자들이 화가 난 여자친구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라 진땀을 빼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한숨을 쉬곤 했다.

그래도 아직 아이인 지라, 그런 나의 고민이 심각해질 새도 없이

금방 평소 때의 밝고 착한 딸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일요일도 출근하고 없어

두 아이와 함께 셋이서 집에만 있던 날이었다.

늘 그렇듯이 둘째는 누나 곁에 꼭 붙어 놀고싶어 했다.

딸은 제 흥에 겨울 때면 동생이랑 너무너무 잘 놀아준다.

웬만한 유치원 선생님보다도 낫고 나보다도 10배는 재밌게 잘 놀아준다.

하지만 그것도 몇 시간 정도지, 딸은 동생에게 방해받지 않고

놀고싶기도 할 것이다. 보통 그럴 때는 내가 둘째와 놀아주고 그동안

딸은 숙제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그런데 그런 배려조차 아이에게 베풀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날은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이사준비 땜에 집안 곳곳에 정리안된 짐으로

나는 헉헉대고 있었고 중간중간에 겨우 허리를 펴면, 

아이들 세 끼니와 간식을 차리느라 또 쉴 틈이 없었다.

둘이서만 노는 시간이 길어지자 동생을 간간히 귀찮아하는 딸의 짜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곁눈질하면서도 그냥 모른척 하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짐정리는 일손을 한번 놓으면 금방 피로가 몰려와 다시 시작하기 어렵기에..)

 

그런데 어느 순간, 큰아이의 짜증이 무르익는다 싶더니

결국 동생을 확 밀쳐내는 딸의 모습과 나뒹굴며 대성통곡하는 둘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딸에게 소리를 지르고 울며 품에 안기는 둘째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본 딸은 자기 방 제일 구석진 곳으로 가 등을 돌리고 앉는게

멀리서 보였다. (또 화가 나서 삐친건가..)

 

둘째가 울음을 그치고 장난감으로 혼자 놀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슬쩍 딸 방을 기웃거렸다. 아직 조용하네? 혼자 노는 건가?

...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딸은 소리를 내지않고 울고 있는 거였다.

몹시 흔들리는 작은 어깨가 클로즈업되듯 내 시야에 들어오는데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 몇 달전만 해도 이럴 때면 대성통곡하며 "동생 필요없어!!!!!!!"

소리치며 엄마에게 오던 아이였는데...  이젠 소리죽여 혼자 흐느끼고 있다...

나는 그때서야 하기 싫어도 꾹 참고 제법 오랜 시간동안 동생을 돌봐준

딸의 마음이 보였고, 아까 둘째만 챙긴 내가 실수를 한 거란 걸 깨달았다.

사태파악이 되긴 했는데, 그런데, 그런 딸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내가 이제까지 알던 딸이 아닌 것 같고,

이렇게 울 땐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해본 적이 없으니...

일단, 둘째에게 잠깐만 조심하고 있으라고 당부해두고

얼른 쓰레기를 집어들고 버리러 나갔다.

(나는 우울할 때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버릇이 있다)

 

몇 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차가운 바깥공기를 쐬면서

'아..우리 딸이 자라고 있구나.. 전과는 다른 거구나..

 나도 달라져야 하고 다르게 대해줘야 하는구나..'

그래. 요즘은 사춘기도 빨리 온다는데 4학년이면 이제 고학년에 접어드는 시기고

변하는 게 당연한 거지... 알긴 알겠는데 오늘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말로 쭉 늘어놓으면 또 엄마의 잔소리같진 않을까.

 

다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오니,

둘째는 여전히 장난감놀이에 빠져있고 딸은 아까 모습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는 부엌 바닥에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어제 생협에서 배달되온 생크림을 기억해내고는

밀가루, 설탕, 달걀을 주섬주섬 꺼냈다.

각 재료를 계량해두고, 거품기를 준비하고, 오븐은 예열했다.

 

그리고 딸이 있는 방을 향해 

"케잌 만들건데 도와줄 사람~??"  하고 소리치니, 얼른 딸아이가 달려왔다.

"할 거야! 나 할래!"

언제 울었냐는 듯 딸은 밝은 표정이었다.(다행이다.. 안 오면 어떻하나 싶었는데)

 

준비해둔 앞치마를 딸에게 둘러주고, 아이가 중심이 되어 만들 수 있도록

나는 보조 역할을 열심히 했다.

달걀, 설탕, 밀가루를 섞어 액체상태였던 반죽이 뜨거운 오븐 속에서

한껏 부풀어오르는 걸 보며 우리는 함께 황홀해했다.

오븐에서 완성된 스폰지 케잌이 식는 동안, 

새하얀 생크림을 거품내고 마침 제철인 딸기도 얹어 장식했다.

그렇게 완성된 생크림 딸기케잌은 화사한 봄기운을 확 느끼게 해 주었다.

 

밀가루와 달걀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케잌으로 변한 것처럼

우리 모녀 사이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화기애애해졌다.

딸은 자기가 만든 케잌이 뿌듯한지 동생을 불러 자랑하며 즐겁게 나눠먹었다.

그리고 다시 밝고 따뜻한 누나와 딸로 돌아왔다.

 

휴...

아이들이 크면 엄마가 몸은 안 힘든 대신, 머리가 아프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딸과 같은 반 아이 중에는 몸이 아파 결석하는 아이들 말고도

친구들한테 싫은 소리 들었다고 하루 쉬거나 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우리 딸뿐 아니라, 같은 또래 모두 이제 슬슬 10대의 증상들이 나타나는 시기인 걸까?

이미 아이들의 내면은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 지도 모른다...

 

어른인 나의 내면도 '나쁜 엄마'와 '착한 엄마'사이에서 매순간 갈등하는데

어쩜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벗어나고 싶은 마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을 게다.

사춘기는 그런 상황이 더 자주, 때론 심각하게 드러나는 시기일테고.

 

이번 기회를 통해

아이와 소통이 막힌다 싶을 때는 말 이외에도

다양하게 소통할 수 있는 꺼리가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의 나쁜 엄마가 또 다시 아이를 울릴 때, 나의 죄책감을 씻을 수

있는 여러 방법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다.

이제 딸과 뭔가 막힌다 싶으면 슬쩍 부엌으로 불러야지.

딸아, 엄마가 그럴 땐 못 이기는 척 그냥 와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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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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