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5_4.jpg » 한겨레 자료 사진


아내는 ‘천사표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큰소리 안 내고, 아이 말을 잘 들어주고, 아이를 존중하는, 자기는 그런 천사같은 엄마가 될 거라고 연애 시절부터 누누히 다짐했다. 엄하디 엄하신 장모님 슬하서 자라면서 단단히 별렀던 걸까 그 얘기를 하는 아내의 눈에선 빛이 났다.


그러나 아내가 아이를 아무렇게나 키우자는, 그런 여자일 리는 만무했다. 워낙부터 길거리에서 버릇없이 구는 아이를 보면 혀를 차는, 그런 여자였다. 직장 동료 중에서도 무례하다 싶은 사람과는 말도 안 섞는, 그런 까칠한 여자였다. 따라서 자기는 천사표 엄마가 될 거란 그런 여자의 선언은, 일종의 역할 분담 요구였던 셈이다. ‘엄부자친’이라는 전통적인 부모관 중에서, ‘자친’(자애로운 어머니)을 자기가 맡을테니 ‘엄부’(엄한 아버지)를 나더러 맡으라는 얘기였다.


사실 나는 좀 떨떠름했다. 세상에 누가 악역 맡는 일을 좋아하겠는가. 나도 ‘천사표 아빠’가 돼줄 수 있는데, 왜 아이들이 싫어하는 역할을 맡으라는 건가. 나름 절절한 항변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일단은 멀고먼 얘기였다. 그때부터 뭐든 못박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몇해가 지나, 우리는 아이 둘을 둔 엄마·아빠가 됐다. ‘엄부자친’의 실상은 놀랍게도 정반대가 됐다.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큰 아이가 두 돌을 넘기면서부터 집에서 흔하게 보게 된 풍경이 있다. 큰 아이가 떼쓰고 소리를 지른다. 아내는 몇차례 “안 돼”라고 한다. 이어 “엄마한테 혼난다”고 경고 수위를 높인다. 결국엔 팔목을 잡아끌고 다른 방으로 간다. 단독면담이다. 설움에 젖은 울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퍼진다. 훌쩍이며 엄마 품에 안긴 채 아이는 돌아온다. 흐느낌이 잦아들 때쯤 작은 아이를 안고 있던 내가 큰 아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건다. 흐느끼던 아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나는 큰 아이와 격하게 놀아주기 시작한다.


결국 아내는 ‘천사표 엄마’를 상당 부분 포기했고, 나는 ‘좋은 아빠’ 구실을 맡게 된 것이다. 내가 설득한 탓이다. “평일엔 새벽별 보고 나갔다가 깜깜한 밤에나 들어오고, 주말도 하루는 대부분 출근하고, 일주일에 겨우 하루 보는 아빤데, 아빠가 꼭 엄하고 무서워야겠냐!” 몇차례 징징댔더니 아내는 수긍했다. 할 수 없이 ‘무서운 엄마’가 된 거다.


나로선 일단 악역을 피했지만, 모든 상황이 아주 끝나는 것은 또 아니다. 아이를 혼낸 날이면, 아이들이 잠든 뒤 아내의 푸념을 또 들어줘야 한다. 과연 잘 하고 있는걸까? 이제 29개월 되는 아이가 말귀를 알아먹긴 한걸까? 새끼손가락 걸고 한 약속은 무슨 뜻인지 알고 한 걸까? 오늘 혼낸 순간이 아이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 건 아닐까?


많지는 않지만 나도 아이를 혼내본 적이 있다. 체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어기고, 엉덩이를 팡팡 때렸던 날도 있었다. 언젠가 혼나는 내내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고 더는 못하겠다 싶어 와락 끌어안았다. 품속 아이에게 “사랑해, 아가, 미안해, 아가“라고 말하던 내 눈도 그렁그렁해졌다. 아이는 이윽고 울음을 멎고 기분도 풀었다. 아마도 그날 밤, 잠든 아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두런두런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팠어? 아빠 맘도 너무 아프네. 남의 자식이라면 그저 예쁘다 귀엽다고만 할 거야. 하지만 너는 내 자식이라 언제고 널 혼내기도 해야하는 건가보다. 아빠도 엄마도, 그저 악역을 맡은 천사란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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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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