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26_2.JPG » 한겨레 자료 사진.


"오늘은 수박이 꼭 먹고싶네."

어느날 저녁 9시께 날아든 아내의 문자메시지. 저녁도 못 먹고 야근을 하던 나는 짧은 한숨을 훅 내쉬었다. '겨울날 저녁 9시 수박' 미션이라...


첫아이 때가 생각났다. 미션은 '겨울날 오후 7시반 애플망고'였다. 그전까지 난 애플망고란 과일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내도 예전에 단 한번 먹어본 게 전부라 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과일이 나던가? 명동의 한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없었다. 옆 백화점에 갔다. 아, 얼마나 오래됐는지 시커멓게 변한 게 딱 하나 남아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4만원.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찾기는 찾았는데..." 일주일 안에 반드시 괜찮은 애플망고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아내는 "할 수 없지"라며 이해를 했다. 하지만 제주산 애플망고는 철이 지났고, 백화점도 더이상 애플망고를 들일 계획이 없다 했다. 임산부가 먹고 싶은 걸 못먹으면 태아가 삐뚤어진다던가.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결국 페루산 냉동 제품을 샀다. 주스용 냉동 과일이라 신선하지 않을텐데 하며 걱정했지만, 아내는 "바로 이 맛이야"를 연발하며 한 봉지를 다 먹었다.


애플망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단 퇴근을 했다. 처음이 아니라선지 마음엔 여유가 있었다. 수박도 제철은 아니지만 애플망고에 견주면 둘째 입맛은 그래도 소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미 지각한 저녁 약속 자리에 가서 양해를 구했다. 잠깐 앉았다가 집으로 가서 차를 몰고 나와 24시간 운영하는 ㅋ마트에 갔다. 제철 가격의 4~5배인 2만원짜리 수박이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얼른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급히 왔더니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서야 그물망을 안 챙긴 걸 알았다. 두팔로 수박을 고이 안아들었다. 자칫 떨어뜨리면 어쩌나 걱정도 들었다. 수박이 깨지면? 제일 큰 덩어리 몇개만 집어들고 집에 가야하나? 아내의 실망스런 표정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머리에 책을 이고 숙녀의 걸음을 연습하는 양, 수박을 안은 나의 걸음은 사뿐사뿐했다.


자정이 다 돼서 수박을 들고 나타난 남편을 보고 아내는 아이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수박을 자르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1/4통을 낼름 먹어치웠다. 아내가 반가워한 건 남편이 아니라 수박이었나? "먹을래?"하며 내미는 수박 조각엔 애플망고의 데자뷔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맞이하는 아내의 임신은 달라진 게 많다. 무엇보다 첫 임신 때 뱃속에 있던 큰 아이가 지금 배 밖에서 초래하는 환경 변화가 크다. 예컨대 뱃속의 제 동생은 아랑곳 않고 동요만 시종 틀어달라 하니 동생은 그 흔한 클래식 태교도 못 받고 동요 (그리고 빽빽 울음소리) 태교를 받는 중이다. 또 걸핏하면 안아달라 떼를 쓰니, 엄마는 홀몸도 아닌데 십몇kg짜리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며 무리를 하고 있다.


수박도 마찬가지였다. 이튿날 겨울 수박 맛을 본 아이는 눈을 살짝 감고 "음~"이라며 음미하더니 어느새부턴가 엄마와 수박을 나눠먹고 있었다. 어디 수박 뿐이랴. 먹고 싶은 게 있다며 어찌저찌 구해바치면 입이 즐거워지는 건 아내와 아이 둘다였다. 아, 뱃속의 아이까지 합쳐 셋이라 해야 맞겠다. 이렇게 온가족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진대, 내가 무엇을 마다할 것인가. 아내여, 오늘의 미션은 무엇이오. 내게 미션 임파서블은 없을지니.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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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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