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jpg » 한겨레 자료사진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아들에게 서서히 자아가 싹트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무조건 해야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안돼”라고 말하며 고집을 부리며 절대 안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먹고, 싸고, 자고 하는 일이 주 일과였던 아들이 자기 주장을 펼치고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아가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만 하다.
 
동네 슈퍼에 몇 주 전부터 수박이 등장했다.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수박은 탐스런 자태를 자랑하며 어서 나를 데려가라고 손짓한다. 책에서만 보던 수박을 실물로 본 아들은 수박을 보더니 엉덩이를 씰룩씰룩거리며 다가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 듯 수박을 얼싸안고 큰 소리로 “슈~박”하고 외친다. 마치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 같다. 수박은 아직은 비싼 편이다. 제법 먹음직스럽고 탐스런 수박은 2만4천원이나 했다. 비싸지만 수박을 부둥켜안은 아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반통짜리 수박을 사서 아들에게 수박의 달달한 맛을 선사했다.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맛이 제 입맛에 딱 맞았는지 아들은 게 눈 감추듯 먹어댔다. 그런 아들을 보며 “그래, 네 생애 첫 수박인데 오죽 맛있겠니.”라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 번 수박 맛을 본 아들은 하루 동안 수박 반 통을 해치웠고, 틈만 나면 “슈~박”을 외쳐댔다. 관심을 다른 과일로 돌려보고, 텔레비전 만화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아이 머릿 속에서 ·“슈~박”을 지우고 싶었다. 하루는 수박을 외치는 아들을 무시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한번 수박 맛을 보고 강렬한 자극을 받은 아들의 뇌 속에서 도파민이 많이 생성됐나보다. 수박 중독에 걸렸다.
 
며칠 전 아침 아들이 눈을 뜨자마자 달려간 곳은 냉장고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모와 부스스 잠이 덜 깬 나를 모두 냉장고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슈박~ 슈박~”을 외쳐댄다. 이모께서는 거의 애걸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민지 엄마~ 제발 우리 민규 수박 좀 사줘~ 어제도 하루종일 나보고 수박을 달라는거야. 없는데 어떻게 줘~ 애는 자꾸 수박 달라고 하지, 수박은 없지...우리 민규 그러면 나도 어떻게 해야할 줄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이모는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속으론 웃음보가 터질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나는 이른 아침 막 문을 연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제일 커다란 수박을  사서 배달을 부탁했다.

“그래, 돈을 왜 벌어. 다 먹고 살겠다고 버는데. 저렇게 수박 먹고 싶다는 아들 수박도 못사줄 정도는 아니잖아. 아들, 기다려. 수박 배 터지게 먹여줄게.”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뒤 배달하시는 분이 수박과 함께 장본 물건들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민규는 수박을 보자 마자 허허 너털 웃음을 지으며 수박쪽으로 다가가더니 자식 품듯 수박을 꼭 안아준다. 수박을 안고 있는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 전생에 수박 못 먹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수박 하나에 죽고 사는 아들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웃기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게는 별 것 아닌 것들이 아이에게는 모두 새롭고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내 일상을 재발견하게 되고, 아이로 인해 매일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것이 아이를 키우는 재미리라.

 

민규 거리 걷기.jpg  

 

최근 아들은 타인에게 유머를 발휘하는 발군의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직장맘이라 직접 보진 못했고, 이모에게 전해 들었다. 이모와 민규가 놀이터에 놀러가 미끄럼틀을 타는데, 민규가 이제는 제법 컸다고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고 했단다. 위험해보여 이모께서 “민규야~ 위험해~ 계단으로 올라가자”라고 얘기했지만 자아가 싹튼 민규군은 막무가내다. 그래서 몇 차례 달래보다 고집을 부려 이모께서 무서운 표정으로 “안민규, 이 놈~ 왜 말을 안들어! 올라가면 안 된다니까~”라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우리 아들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살포시 올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쉿~”했다고 한다. 이모는 그런 민규의 모습에 너무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고 말았다 한다. 이모가 무섭게 혼내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런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이모 얘기를 들으며 한참을 웃고 말았다. 어른인 나보다 재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발달 전문가들은 세 살은 ‘자아’에 대한 내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또 ‘말로’ 통하는 세상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을 때이며, 한시도 가만히 있기 어려울 만큼 ‘활동성’이 폭발하시는 시기라고 말한다. 민규를 보면 딱 그런 시기다. 집안의 모든 서랍은 뒤져야 직성이 풀리고, 책장에 꽂아놓은 책은 모두 빼놓아야 한다. 빗자루로 청소하기, 걸레질하기, 물뿌리개 눌러보기, 방충망 구멍뚫기 등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봐야 한다. “슈~박” “야옹야옹”“음머~”“꽥꽥”“아~ 진짜~” “와봐~”등 의성어와 감탄사, 몇 개의 단어들로 자기의 의사표현을 분명히 한다. 민규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롭고 다채롭다. 하루하루 다른 모습을 보이며 성장해가는 민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앞으로 민규는 또 어떤 에피소드를 내게 전해줄까 벌써부터 설레인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청소하는 아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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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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