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할아버지 댁에 머무는 주말 저녁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힘들었을 때 곁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동네 형님이었다.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 갑자기 변한 아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던 터였는데 이번에도 그 아이 이야기를 꺼내며 다소 흥분했다.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아이를 만나 조언을 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의 목소리였다. 몇 마디 말로 사람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힘들 때 전화를 걸어 준 그 기억이 고마웠다. 서둘러 형님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전화를 걸었다. 서 너 번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차 안에서 기다렸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차 안에서 라디오 음악을 듣고 있는데 조수석 창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형님을 가슴 앓게 한 바로 그 아이였다. 고 3인 그 아이의 키는 190cm에 가까웠다. 창문을 열었을 때 그 아이는 고개를 숙여 창 안에 앉은 나를 바라봤다.
 “죄송해요.”
 인사도 없이 아이는 먼저 죄송하다고 했다. 순간 차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너 거기 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모른 채 다시 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아이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창문만이 덩그러니 열려 있었다.
큰 키를 지닌 아이는 껑충거리며 동네 좁은 길을 가로질러 뛰어 갔다. 그리고 그 아이 뒤를 쫓는 형님의 모습이 보였다. 190cm의 키에 100kg이 넘는 아빠는 비슷한 키의 깡마른 아이 뒤를 쫓아 달렸다.
형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난 아이가 더 빨리 뛰어가기를 기도했다. 아빠의 육중한 몸이 발산하는 힘을 생각하면 잠시 아이가 아빠를 피하는 게 아이를 위해 바람직할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어두운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난 뒤 다시 한참을 차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아이 뒤를 쫓았던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리퍼를 끌리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차밖으로 나왔다. 형님은 고 3학 부모로서 갖는 고뇌를 털어놓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들어오고 공부는 뒷전인 아이의 인생을 아빠는 무척 걱정했다.
 “그런데 남구야.”
 “네?”
 “그래도 내가 말이야, 내가 너 어머니 때문에 산다.”
 “네?”
 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왜 우리 어머니?
 “네 어머니 봐라. 너 대학 보내서 졸업시켜놓았지. 그리고 어렵다는 취직 뒷바라지도 했지, 그리고 결혼까지 시켜놓았지.”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갑자기 내 지난 인생이야기가 이 대목에서 왜 나왔을까.
 “그런데 멀쩡한 직장 그만 뒀지. 다시 결혼 걱정하셔야지. 얼마나 걱정이 많으시겠니. 나도 속상하지만 네 어머니보다는 그래도 낫다.”
 난 그 날 깨달았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형님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렵다던 평생직장 정규직으로 그것도 아들이 오랫동안 꿈꾼 기자까지 되었으니 두 다리 뻗고 편히 지내실만 했지만, 갑자기 모든 걸 잃어버리셨을 절망감이 어머니의 삶을 집어삼켰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큰 딸을 갑자기 여읜 장모님의 슬픔은 짐작을 할 엄두도 나지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어머니는 성당에서 십자가를 향해 속으로 소리치셨다고 했다.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그렇다고 갑자기 아내를 여읜 아들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어머니는 속으로만 아파하며 그저 아들이 그 시련의 시기를 잘 헤쳐 나가기를 묵묵하게 바라셨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민호가 학교를 가고 난 뒤 오전 10쯤이면 집창밖으로 유치원 아이들이 아장 걷는 모습이 보인다. 단지 안에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은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난 뒤 작은 정원을 걸으며 웃고 뛰며 몸을 움직였다.

 5년 전엔 민호도 저만큼 어렸는데 이제는 어느 덧 아홉 살 아이로 컸다. 당시엔 싫었고 믿을 수 없었던 말,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은 지나갔고 절망과 슬픔도 태풍이 지나간 하늘처럼 개었다.
 주말을 앞둔 저녁 걸려온 어머님의 전화를 바쁘다며 끊으려 하자 어머니께서는 언짢아 하시며 물으셨다.
 “넌 뭐가 그렇게 바쁘니?”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만 해도 당장 먹고 살 걱정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셨는데, 이제는 강연이다 글이다 공부다 살림이다 하며 바쁜 아들의 모습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하셨다.

 가끔씩 사람들이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냐고 지나가는 말로 물을 때마다 5년 전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의 부모님의 모습은 하늘을 닮았다. 아무런 말없이 저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하늘. 어디로 가든,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든, 아니면 울며 지쳐 잠이 들어도 온세상을 덮는 이불처럼 나를 덮어주는 하늘이었다. 삶의 고난과 힘겨움이 어깨와 목을 짓눌러 고개를 숙였을 때에도, 나를 바라보는 하늘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면 항상 그 곳에 있었던 하늘처럼, 언제 어디서든 항상 내가 쉬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였다.

 

 시련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지만 시련을 겪을 때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그 시련을 넘어가게 했다. 걸음마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넘어져야 할 사람은 바로 아이 자신이었다. 하지만 넘어질 때 나를 바라봐주고 응원해주고 같이 아파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아이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사람을 보며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일어선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일으켜 세우고 거짓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상대를 작게 만든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불편하다면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일 게다. 진정한 사랑은 나에게 힘을 주고 거짓된 사랑은 나의 힘을 빼간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보다 받는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 진짜 사랑과 거짓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부모님께서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런 하늘을 닮고 싶다. 나를 향해 가끔씩 고개를 돌리더라도 아이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봐주는 하늘을 닮고 싶다. 아이가 힘들어 지치고 쓰러질 때에도 속으로만 응원할 수 있는 하늘의 인내를 닮고 싶다.

 

 창밖으로 꽤 오랫동안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엄마가 사랑할 때.jpg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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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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