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BF%88%ED%8B%80%EC%9D%B4%EA%B2%8C%EC%9E%84%20(13).jpg » 꿈틀이 보드게임.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는데, 엄마는 아팠다. 바람결이 부드러워지는 요즘에서야 감기가 물러가는 기미다. 이번 겨울을 나는 두세달가량 감기가 아예 몸에 눌러앉았고, 그로 인한 탓인지 피부 곳곳 미친 가려움증의 게릴라 습격이 밤잠을 괴롭혔다. 이비인후과와 피부과를 번갈아가며 약을 먹어봐도 그때뿐, 찬바람을 쐬면 목감기가 심해지고 반대로 몸을 데우면 가려움 발작이 일어 피딱지가 앉도록 긁어야 했다.

 

화해하지 못하는 상반된 증상으로 지친 몸은 회사일과 기본적인 집안일 처리에만도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때로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도 찾아왔다. 엄마가 시들시들하니 앙큼군이 뒷전으로 밀리는 날이 잦았다. 밤이면 목이 칼칼하고 갈라져 그림책 보는 일상 또한 매끄럽게 이어질리 없었다. 엄마의 시간과 에너지를 요하는 도서관 대출도 겨울동안 잠정 중단됐다.

 

엄마랑 책보기가 줄어들자, 앙큼군의 일상에는 아빠와의 게임이 파고들었다. 앙큼이는 이기고 지는 게임을 무척 좋아했다. 아니 무조건 이기는 게임을 좋아했다. 왕년에 스타크래프트 고수 경지에 올랐던 아빠의 게임 유전자를 물려받은 앙큼이의 승부욕은 반칙을 불사하더라도 이겨야만 했다. 아빠랑 장기를 두면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7살 두뇌가 판판이 당했지만 결국 이기는 자는 앙큼이었다. 왕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외통수라도 하늘로 솟아나는 길이 있다. 떼쓰기, 무르기, 장기알 빼내기 등 갖은 패악은 가장 강력한 반전카드였다. 아들에게 게임의 법칙이 먹히지 않자 남편은 아예 아이와 한편이 돼 컴퓨터를 상대로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장기판을 깔고 컴퓨터 수를 그대로 옮겨놓고 두는 방식인데, 과연 컴퓨터에겐 떼쓰거나 무르기가 통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로 진입했는가 싶었는데.

 

앙큼이에게 패배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임에 분명했다. 내가 아파서 드러누운 날이었다. 아빠와의 보드게임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까르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방에서 두통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빠가 내리 두어 판 져줄 때까지 훈훈하던 분위기가 이내 냉랭해졌다. “나 다신 안해!” 울음으로 끝난다. 두통이 더 지끈거린다. 허나 돌아서다 말고 아빠에게 또 게임을 하자는 앙큼이, 진정 게임하는 인간의 원형질이다.

  %EC%82%AC%EB%B3%B8%20-1601%EA%BF%88%ED%8B%80%EC%9D%B4%EA%B2%8C%EC%9E%84%20(23).jpg » 마법카드의 반전에 통쾌한 웃음을 날리는 앙큼군.

가장 즐겨하는 보드게임은 <꿈틀이 구조대>(가베야 후요우 글 그림 양선하 옮김/한림출판사, 2014)의 부록으로 딸린 보드게임이다. 꿈틀이 마을 보드판과 주사위, 꿈틀이마을 주민으로 된 ’ 4개와 마법카드 16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앙큼이는 땅속 지렁이마을 이야기를 그린 책도 재밌게 봤지만, 보드게임에 빠져 엄마아빠를 승리의 제물로 삼는 쾌감을 더 크게 느끼는 듯했다. 한동안 저녁 설거지를 물리기 바쁘게 주사위를 던져야 했다. 갈림길에서 질러가기, 앞으로 2, 뒤로 3, 구덩이에서 한 번 쉬기 등 기본법칙은 같으나, 게임의 흐름을 뒤집는 마법카드가 의외성을 키우는 게 이 게임만의 재미다. 도착지에 먼저 다다른 사람이 땅속 꿈틀이 마을을 땅위 두꺼비로부터 지켜내는 꿈틀이 구조대원이 된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앞으로 3칸을 가세요.’

아싸~!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앙큼이의 애창곡이다. 최근 18번은 독도는 우리땅. 전국 유치원 권장곡이라도 되는 듯 주변 모든 아이가 불러 제치던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을 떼고 난 다음, 독도는 우리땅 5절을 비장하게 불러댔다.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을 외치던 꼬마는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며 평균기온 12도 강수량은 1300, 우물 하나 분화구의 지질학적 특징까지 꿴다. “엄마, 나는 이 세상에서 일본이 제일 싫어.” 나라 이름도 제대로 모르던 앙큼이가 어느날 잠에서 깨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노래가 자아내는 느낌을 이분법적으로 나름 추론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른쪽 옆에 있는 친구와 말을 바꾸세요.’

 

앞서 나가던 아빠 말이 뒤쫓아오던 앙큼이 말과 바뀌는 순간, 전세는 훽 뒤집어졌다. 웃음보를 참지 못해 구르던 앙큼군, 반전 마법카드의 힘으로 이제 주사위 몇 번만 던지면 승리는 앙큼이의 것. 앙큼이가 이기게 되는 경기흐름은 평화롭다. 둘이 할 때의 승률은 50%, 셋이 할 때의 승률은 33%이기에 앙큼이도 패배의 쓴맛을 봐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앙큼이 승률 100%. 무조건 이겨야 신나는 이 녀석은 반칙의 능수다. “정정당당하게를 외치지만 앙큼군에게 그 말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게임의 법칙. ‘뒤로 2을 가라고 하면 아빠 혹은 엄마 말을 뒤로 2칸 움직이고, 주사위 숫자가 지름길에 한칸 못미치게 나와 돌아가야할 지경이 되면 슬며시 한칸을 밀어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고속으로 내뺀다. 심지어 한번 쉬어야 하는 벌칙을 받고도 자기가 던질 차례라며 막무가내로 우긴다. 무소불위 게임판의 제왕을 이길 수 없으니, 두판쯤 돌면 어른들은 시들해져 뒤로 빠진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나이이니, 당분간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그래, 인생에서 쓴맛은 천천히 알아도 늦지 않다.

 

07518081.jpg » <꿈틀이 구조대> 책 표지. 게임의 재미를 알기 시작한 앙큼군에게 <꿈틀이 구조대>는 재밌는 놀이책이다. 지렁이들이 사는 땅속 동네에는 꿈틀이 치과와 땅속 찻집, 꿈틀이 유치원, 미용실, 슈퍼, 빵집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부부의 자녀는 36마리, 손주는 57마리, 증손주는 103마리로 계속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꿈틀이 마을에는 구조대 대장과 꿈틀이 마을 최고 수다쟁이 재재아줌마도 살고 있다. 어느날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사이렌이 울려퍼진다.땅위에 비가 내려 우리의 적 두꺼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1호방으로 피하십시오.” (자연재앙이 많은 일본스러운 설정이다.) 온마을은 허겁지겁 피신하느라 난리가 났지만, 꿈틀이만 드르렁 쿨쿨, 잠보가 늘어졌다. 두꺼비가 맛있는 먹잇감을 덮친 그때, 용감한 꿈틀이 구조대가 나타나 구해준다. 꿈이 없던 꿈틀이는 구조대가 되겠단 마음을 먹고 '알통 꿈틀이'로 거듭난다.

 

내용적으로는 꿈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책은 인간의 놀이 본능을 깨우는 묘미가 있다. 소상하게 그려진 꿈틀이 마을 숨은 그림 찾기, 지렁이 마을을 닮은 땅속 세상 그려보기, 구조대원 되기 게임 활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앙큼이가 승률 100%의 시시함을 깨닫게 되는 날이 아마도 이 게임의 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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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순
일찌감치 결혼했으나, 아이 없이 지낸지 13년. ‘룰루나 행성’에서 꽃을 키우며 지내던 앙큼군은 우주 폭풍을 만나 어느날 지구별로 떨어졌다. 아이가 없는 집을 둘러보다 우리집으로 왔다. 어딜 가나 엄마들한테 ‘언니’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늙은 엄마’이지만, 앙큼군은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다행이야”를 달고 사는 여섯 살 소년으로 자랐다. 곰팅맘은 현재 한겨레 편집 기자이며, 책과 지성 섹션에 어린이청소년 책을 소개하는 기사도 쓰고 있다.
이메일 : gskwon@hani.co.kr      
블로그 : http://plug.hani.co.kr/gh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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