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일들이 많았던 9월을 힘들게 보내고 나니

사는 게 다 귀찮고 허무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가을 날씨는 이런 내 기분을 더 부채질한다.

40대가 되기 전엔,

매사에 시큰둥하고 삐딱(?)해 보이는 중년 여성들을 보며

'뭐가 저렇게 불만일까'

싶었는데, 요즘은 남들 보기에 내 모습이 딱 그럴 것 같다.


뭐 하나 위로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다고 느낄 즈음,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아니 이런!  구절구절마다 빵빵 터지고 속이 후련해진다.

우울하게 가을을 앓는 아줌마들에겐 정말 딱일 것 같은 이 책은,

<백 만번 산 고양이>란 그림책으로 유명한 '사노 요코'의 에세이다.


일본에선 쿨하고 시크한 할머니로 유명한 그녀의 <사는게 뭐라고>는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고 난 전후의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다.

우울증은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고 멀어지게 했지만

암에 걸리니 다들 친절해 진다며, 암은 좋은 병이라고 말하는 할머니 작가.


암 선고를 받고 난 그 길로, 평생 타고 싶었던 차를 사러 가는가 하면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물건을 쓰고 싶다'며 예쁜 부츠를 사고

마음에 드는 잠옷을 산더니처럼 사잰다.

또 한국 드라마에 빠져 하루종일 티비만 보다가 턱이 돌아갔다는 장면에선

정말정말 많이 웃었다. 할머니가 쓴 책을 보며 이렇게까지 웃은 건 처음이다.

그림책 세계의 대작가도 빠지게 만들었던 한류의 힘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일본 아줌마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선전에 휘둘린 것도 아니고 잘난 평론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 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띄웠다.

그러고는 창피고 체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빠져서 일본을 바꾸어 놓았다.

외교관도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못한 일을 아줌마들이 해냈다.

나도 그 물결에 뒤늦게 올라타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


                            - <고> / 코 -


철없는 어린애처럼 눈치보지 않고 쏟아놓는 불평불만에 공감하며 웃다가도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담긴 글들을 만날 때는

걸작 그림책을 만든 작가다움이 느껴졌다.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다.

...

아아 당신도 잘 살아냈구나.

이 체온으로, 이 뼈로, 이 피부로

나.

...

나는 일평생 같은 실수를 반복해 온 듯하다.

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다.


다.
다.


이 중에서도 가장 공감이 갔던 구절은

"늙은이는 공격적이고 언제나 저기압이다."  였는데


아직 노인이 아닌데도 왜 그런지, 가족들에게 늘 공격적이고 저기압인

나의 요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면서도 서글펐다.

근데 사노 요코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어쩐지 위로가 되고 삶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들 이렇게 겨우겨우 살아가는구나..' 싶다.


냉소적이고 쿨한 작가였던 사노 요코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몇 권의 에세이는 별 것 없이 하루하루 흘러가는 듯한

우리들의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아이돌들의 영상이나 클릭하며 세월을 탕진하는 나 자신을

항상 한심하게 여겨왔는데,

사노 요코 할머니가 보신다면 쿨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실 것 같다.


"그래도 넌 아직 턱은 안 돌아갔잖아.뭐 어때?"


그래. 가끔은 이렇게 외치고 싶다.

사는게 뭐라고!

육아가 뭐라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현금을 총동원해서 손에 쥐어주며
제발 주말 하루만이라도 나 혼자 있게 해달라고 빌며 집밖으로 내보냈다.

마음이 바뀐 그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까봐 현관 자물쇠를 이중,삼중으로 걸어잠그고

차가 동네를 빠져나갈 때까지 베란다 창으로 지켜본다.


두 아이를 태운 남편의 차가 내 시야에서 흔적없이 사라졌을 때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거실 가장 편한 자리에 퍼질러 앉아

미리 사둔 동네 빵집의 샌드위치와 차로

혼자 게걸스럽게 늦은 점심을 먹는 일요일 오후.


이렇게라도 해야 좀 덜 공격적인 아줌마가 되지.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잘 키워야 한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가끔은 내 멋대로, 나를 좀 놓아주고 방치하며 살고 싶다.


사노 요코 할머니에게 배운 일상의 지혜를

이 우울한 계절에,

곶감을 한알씩 빼먹듯 요긴하게 써 먹어봐야 겠다.



DSCN56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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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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