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세헤라자데다. 츄리닝 입은 세헤라자데. 애 둘 딸린 세헤라자데.
그녀와 몸매와 비쥬얼은 좀 많이 달랐을 것 같지만, 그래도 요즘 매일밤 나는 그녀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일 밤. 그렇지 매일밤. 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야기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는 얼굴을 한 두 명의 어린이가 있다. 며칠이면 되겠거니 했던 이야기의 릴레이는 어째 끝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엄마 내일 이야기는 뭐야? 엄마? 엄마? 내일 이야기는 뭐야? 설마.....나 내 발로 아라비안나이트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인가............
시작은 가벼웠다. 자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꼬이는 일종의 미끼였다.
잠은 인생이 주는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남편과는 다르게 우리집 애들은 잠이 없다. (엄마, 아빠가 소싯적에 애들 몫까지 자버려서 인가...........)
아이들은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한다. 그렇다고 그 두명이 깨어있는 시간에 영어공부를 하거나 체력단련을 한다거나 하면서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것은 아니다. 100% 에너지가 충전된 상태로 그냥 논다. 너무 열심히 놀아서 방해하기 미안할 정도다. (엄마, 아빠가 소싯적에 안쓴 에너지가 모두 애들한테 간 것인가.............)
그래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이라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을 낚기 위해 침대 속 이야기로 꾀어냈다. 월척. 나의 두 마리 강아지들은 대뜸 낚였다.
시작은 숲속에 사는 토끼이야기. 원래 시나리오가 없다보니,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엉성했다. 이름도 하나와 두리 (차범근 토끼 식구도 아니고) 하........성의 없다.
이야기를 대충 간추리지면, 토끼 하나 귀염둥이. 어느날 동생 둘째 토끼 두리가 생김. 그래서 약간 질투. 그래도 결국은 사이좋은 남매가 됨. 현실과 픽션을 대충 섞었다.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나의 당부를 교훈으로 포장해서 내놓았다. 밋밋한 유기농 과자 같은 맛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반응은 의외였다. 아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푹신한 이불처럼 덮고 달게 잠이 들었다. 뭐지? 다른 수많은 동화를 읽어준 것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드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이들의 호응에 힘을 입은 이야기들은 밤마다 이어졌다. 아는 동물들은 총동원 되고 있다. 매일밤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다 보니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도 구태의연의 끝판왕이다. 하나와 두리, 종다리, 도니, 쥐돌이, 영깽이, 히포, 세실 등 (이게 뭐니 이게)
너무 많이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니 그전에 했던 이야기들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쌓인다. 도원결의 세 명이외에도 수백명이 등장했다 사라졌던 '삼국지'가 될 판이다. 물론 동물 버전으로.
신기한 건 아이들은 다 기억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첫편의 주인공 하나와 두리는 어떻게 지내는지, 예전에 싸웠던 도니와 쥐돌이는 사이가 다시 좋아졌는지. 녀석들은 궁금해했다.
내가 어수룩하게 대충 지어냈던 이야기 속 동물들이 내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피곤해도 아이들에게는 꼭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다짐은 하고 있다.
물론 얼마 전 어느날은 너무 피곤해서 "숲속 친구들 오늘은 운동회 있었데. 완전 피곤해서 모두 잠 들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생략했다. 다섯살 딸은 정말? 친구들 피곤하데? 이러면서 잠이 들었지만, 머리 굵어진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은 "엄마 뻥쟁..........."이러면서 궁시렁거렸다. (다만 피곤에 쩔어 어느새 침까지 흘리며 자느라 더이상 뭐라했는지는 못들음)
요즘에는 내일 이야기 예고편까지 하고 있다. 안그래도 피곤한 밤. 괜히 이야기를 시작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다가 정말 천일야화 되는거 아냐?
그러다가 문득 1000일이 지난 뒤 아이들과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3년 뒤. 아이들은 여전히 밤에 나에게 이야기를 재촉할까? 포동한 아기들은 미끈하게 커버려 나의 곁에서 조금은 멀어져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천 일을 못갈 수도 있다........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이들의 세헤라자데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천 일이 채 안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아이들이 찾는 동안에는 엄마의 숲속비안나이트는 계속 되리라! 어둠 속에서 괜히 가열차게 다짐해 본다.
근데. 슬슬 소재가 떨어져간다. 오늘밤 예고편에 따르면 내일 이야기 제목은 '무서운 표범 선생님'인데, 선생님 이름도 아직 못정했다. 표랑이? 범표? ........창작의 고통은 계속된다....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