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가 계신 강원도로 놀러가 모래찜질을 하는 아이들
"맡아줄 사람이 없는데 어쩌지 엄마?"
"어쩌긴 어째 내가 봐줘야지. 주말에 데리러 와."
"고마워. 엄마"
그렇게 지난 주에 아이 둘을 시골 엄마집에 맡기고 서울로 왔다. 아이들의 방학. 이미 놀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아들과 딸 둘만 엄마에게 맡기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 동안 사정이 생겨 방학 돌봄교실에도 못가게 된 아이들. 여름휴가는 다 끝났고, 결국 내가 찾은 비빌 언덕은, 맨날 비비던 그 언덕. 서른 여덟해나 비비고도 계속 비비는 그 언덕 친정엄마였다.
사실 나의 엄마는 나이가 많다. 나이 마흔에 본 막둥이가 바로 나다. 그래서 엄마는 일흔 여덟이다. 다행히 아직 건강은 괜찮으신 편이다. 시속 1km 정도인 나보다 약 다섯배 정도 빠르게 걷는다. 그래도 노인이다. 여기 저기가 약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납덩이 같은 마음이 질질 끌렸다. 출근 뒤 사무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먹고 잘놀고 있으니 걱정마라"
기운찬 엄마의 그 말에 나는 정말 걱정을 말았다. 오랜만에 저녁에 약속을 잡고, 사람들을 만났다. 즐거웠다. 서울 올라올 때 내 마음 속에 있었던 납덩이는 여름날 밤공기 속으로 분해되어 날아간 듯 했다. (자식이 이래서 다 소용 없는 거다)
임시공휴일로 근무가 조정이 되었다. 다행히 예정보다 하루 일찍인 목요일에 시골에 내려갔다. 며칠 만에 본 엄마는 얼굴이 좀더 홀쭉해 진 것 같았다.
지난 며칠 간, 내가 너무 심하게 비벼서 엄마라는 언덕이 더 움푹해진 것일까. 괜히 겸연쩍어져 엄마를 데리고 보양을 한다며 백숙을 먹으러 갔다. 나이드니 소화도 더 안된다며, 엄마는 조금 먹었다. 그러면서 내 아들에게 닭죽을 호호 불어먹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언제나 그렇듯 엄마가 싸준 야채며, 김치가 다시 가득 담겼다.
"도착하면 잘 도착했는지 전화해" 백미러로 손을 흔드는 엄마가 작아졌다.
지난번 서울에 올라왔던 엄마를 시골로 데려다주며 지났던 고속도로를 나는 다시 거슬러올라 갔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그 길에서 엄마는 여름날 무성한 나무들로 실하게 살이 오른 산들을 보며 좋아했다. 산들이 여름이라 젊고 싱싱하다며.
그러면서 엄마는 말했다. "그런데 나는 늙었지만, 그래도 내 인생 중, 내 시간 가지고 혼자 사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 것 같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11살에 전쟁을 겪고, 스물 셋에 시집온 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들을 원하는 시어머니 밑에서 계속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운명도 무심하게 그렇게 낳은 여섯 아이 모두 딸이었다.
딸들은 아이들를 낳았고, 그 중 몇몇은 다시 엄마의 손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엄마는 인생의 후반부에도 엄마의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면서 숨이 턱턱하고 차오를 땐 염치없이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다시 기댔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이 마흔에 노망이지 내가 너를 왜 낳았을까" 하면서도 언제나 나에게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울 엄마는 요새말로 치면 츤데레 스타일이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엄마의 행복한 시간을 더이상 뺐지 말아야겠다고. 그리고 나도 이제 엄마니까 (사실 엄마된지 7년이나 지났.......) 내 엄마에게 훨씬 더 잘 해야겠다고. 이렇게 대외적으로 글이라도 쓰면 정말 더 잘 하리라 본다. 나는 남의 시선 의식쟁이니까.
서울에 도착한 날 아이들은 일찍 잠들었다. 머리를 쓸며 가만히 보니 못본 며칠 새 볼들이 더 통통해졌다. 외할머니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이것저것 만들어 살뜰하게 먹인 덕이리라. 괜히 콧물이 훌쩍 나온다.
고마워 엄마........그리고 언제나 미안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