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내 여행기에 이런 제목을 단 에피소드가 있다. 장소는 시드니. 제목은 이별, 마지막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드니는 우리가 호주 대륙에 첫 발을 내딛은 ‘시작’의 도시였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가 결혼한 커플에게 기대하는 것들,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모아 집사고 차사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만이 정답인 것처럼 강요하는 사회에 저항하고, 임신 출산 육아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첫 도시였다”, 는 건 진실이긴 하나 너무 비장하고.
하여튼 ‘엄마’란 새 직함을 얻기 전에 맘껏 우리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던 차에 도착한 곳이 시드니였다.
‘처음’이란 단어는 얼마나 힘이 세던가.
첫 사랑, 첫 키스, 첫 섹스, 첫 여행. 처음은 그 자체로 운이 좋다. 지루할 틈이 없는 미지의 세계. 기대감이 크지만 상대치가 없으니 결과치에서도 자유롭다. 설사 기대에 못 미쳐도 다음에 잘 하면 되니까 괜찮다. 그러니 부담 백배인 두 번째, 세 번째 입장에선 참 불공평한 처우인데, 어쨌거나 처음은 조금만 선전해도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어쩐지 이 공식이 육아에선 정 반대로 통용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처음의 가장 큰 수혜는 ‘추억’이 되었을 때다. 카테고리 별로 저장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처음이라고 기억되는 어딘가에 가 닿으니까. 그러니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첫사랑이 그렇게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우리의 첫도시, 시드니는 아름다운 항구였다. 3대 미항으로 불리는 나머지 두 군데는 아직 안 가봤지만, 아마 시드니보다 더 감동하기는 어렵겠지(이것 또한 처음의 미덕일 것이다).
문화 수도, 상업 수도, 여행의 수도에는 온갖 볼 거리, 할 거리, 먹을거리가 거리마다 넘쳤고, 해변은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눈이 부셨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도시를 관통하던 삶의 여. 유. 한 달 만에 부리나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던 건, 시드니에 더 있다가는 다른 곳으로 아예 떠날 생각을 못할 것 같아서였다.
요즘 들어 자주 이 시드니 챕터를 펼쳐보는 건 또 다른 이별을 앞둔 때문이다.
결국 출판사 외 다른 생계수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정확히 만 3년 만에 나는 도시의 월급쟁이로 돌아왔다. 33개월 큰 아이는 내가 다니는 직장 어린이집에 출근한지 나흘째. 오늘은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대성통곡을 하는 통에 나도 뒤돌아서서 엉엉 울고 말았다. 집도 직장 근처 아파트로 옮길 작정이어서, 화순 댁으로 나를 소개할 날도 이제 딱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귀촌, 귀농, 귀향, 탈 서울.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표현하는 말들이 때로는 너무 거창해서 나를 짓누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축대였음도 부인할 수는 없다.
큰 아이가 돌이 되던 무렵, 화순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이 공간과 인연을 맺은 덕분에 아이들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그러므로 실은 매일) 누구보다 여기 베이비트리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겉으로 보면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일기’는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나와 우리 가족 개인의 성장기지만, 우리 방식에 응원을 보내주시는 분들, 지금껏 받아온 세상의 보살핌에 대한 내 방식대로의 작은 보답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것들이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긴 했지만 시골살이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일단 낡고 오래된 주택에서 사는 것부터가 벅찼다. 며칠만 손 놓고 있으면 텃밭과 마당은 금세 잡초로 무성해지고, 개똥은 눈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신발을 신고 뒷마당으로 나가 거미줄을 걷어낸 뒤 빨래를 널고, 해 질 녘 다시 걷어오는 것도 ‘일’이다. 요즘같이 집안에 온기가 없는 계절이면 따뜻하고 편리한 도시의 아파트 생각이 절실하다.
농부란 직업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유기농, 친환경 농업 전도사라도 된 양 퇴비만 열심히 뿌렸건만 이 배신자들! 고구마는 뿌리 대신 싹만 무성하게 컸고, 감자는 그나마 싹 하나도 구경하지 못한 채 일 년 농사가 끝났다. 가지와 고추는 따도, 따도 넘쳐서 여기저기 퍼주다 나중에는 모르는 척 말려서 죽이기에 이르렀다.
부화기까지 사들이며 공을 들였는데 살아남은 닭보다 땅에 묻은 닭들이 더 많다.
벌레는 또 왜 그리 크고 많은지. 이불, 장난감 더미 등 집안 곳곳에 포진해 있다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기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밟아 죽이고, 때려죽이고, 박멸 스프레이 세례를 퍼부으며 살생을 저지른 날 밤이면 젖먹이 몸통 위로 남자 어른 손바닥만 한 지네가 기어오르는 악몽에 시달리고 만다.
“풀 안 뽑아? 자네들 닭이 우리 밭을 다 망쳐놨구먼. 무 더 속아야 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도시의 개인주의에 길든 자에게 아무 때나 찾아와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서는 관계는 불편하다. 거기다 경이롭던 앞산마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철창처럼 느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에 우울증마저 겹친다.
나는 무엇을 위해 도시를 떠나왔는가. 지금 제대로 사는 것인가.
삶이 통째로 흔들리고 부정당하는 순간, 당장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가고만 싶다.(중략)
어느 글에서 나는 시골생활에 관해 이렇게 묘사했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주신 독자가 계셨을지 모르겠는데, 당시 나는 (아마 대다수 도시에서 살고 있을 분들에게) 도시나 시골이나 내면은 똑같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만 기쁨과 환희의 지점,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지점이 각자, 혹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그 칼럼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여기서 언제까지 머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시골 생활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줄 거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뿐이리라.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걸까. 화순에서 사는 내내,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우린 도시로 돌아간다.
2년 전, 서울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까지 머물지, 다시 시골마을로 돌아갈지 어떨지. 불안정성도 여전하다. 그러나, 확실히 시골 생활은(혹은 세월은) 나를 더 단단하게 해주었는데,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화순에서 나는 그렇게 바라던 첫 책을 냈고, 둘째를 출산했고, 내 안의 깊은 밑바닥을 경험했고, 세상에 더 큰 애정을 품게 되었다고 답하겠다. 무엇보다 어떤 결과도 실패로 여기지 않는 유연함.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을 하나씩 품고, 그저 최선을 다해, 성심을 다해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뿐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답하겠다.
그런데도 막상 다시 도시로 가는 결정을 내리는 일은 서울을 떠날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더라. 나에게 도시로, 아파트로 돌아간다는 건...
손자가 버리고 갔음 직한 유행 지난 잠바를 입고 보건소 계단에 앉아 볕을 쏘이는 노인들과, 목줄이 풀고 신 나게 질주하는 개와, 구구구 떼 지어 마당 구석구석을 헤집는 닭들과, 그걸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와, 내 옆에 잠든 남자의 얼굴 위로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풍경과, 돈은 못 벌어도 소신껏 살아간다는 자부심과의 작별이므로.
시드니를 떠나던 날 나는 예정된 수순처럼 눈물을 쏟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의 눈물은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한 인사 혹은 다짐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고마웠어, 오래오래 기억할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다가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하는. 형식은 눈물이었지만, 실은 새 날들에 대한 설렘과 희망이 더 크게 얹어져 있었다. 아쉽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새 날들에 대한 희망과 설렘도 여전하다.
그러니 그때처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다가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하고 싶은데
어쩐지 따식이와 꼬고야들과 할매 할배들을 볼 때마다 눈이 시큰해진다.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성심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는 것뿐이리라.
2013년 10월
201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