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버스를 타고 시내의 큰 놀이터에 나가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아시안 엄마, 아빠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엄마 아빠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아빠들은 대개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고, 엄마들은 아이들 뒤를 따라 다니며 말로 이리저리 지시하거나 주의를 주느라 바쁘다. 오늘 오전, 아는 한국인 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도 그런 흔하디
흔한 ‘아시안 육아’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바닥 분수대 옆에 퍼질러 노느라 엉덩이를 적신 채 앉아 있는 우리 아이들 옆으로 다른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스쳐간 지 몇 초 되지 않아, 낯익은 말이 내 귀에 쏙 들어와 박혔다. “00야, 옷 젖는다. 안
젖게 조심해!”
아이들 놀라고 설치해 둔 바닥 분수대를 보고 물을 만져보겠다고
다가서는 아이와, 옷이 젖으니 이리 나오라고 외치는 엄마. 귓전을
때리는 모국어의 힘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못들은 척 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손으로 물을 첨벙이며 ‘앗 차거!’를 연발하는 케이티 덕분에 우리가 한국인인 것은 이미 드러나고 있었지만 괜히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해질
것 같았다. 근처에 앉아 있던 또 다른 가정은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경우였는데, 한국인인지 아닌지 파악은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아빠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엄마 아빠는 애들은 풀어놓고 어른들끼리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의 놀이에 방해가 되는 게 목격되면
얼른 다가와 상황 정리를 한다. 소란을 피우는 자기 아이를 진정시키고,
말로 설득하고, 다른 아이에게 방해가 되었다면 직접 사과를 하며 양해를 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하고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간다. 물론 아이를
완전히 방치해둔 채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많은 경우 아이가
잡아 끌면 엄마든 아빠든 아이 손을 잡고 아이가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는 걸 봐 주고 높은 미끄럼틀을 탈 때 박수를 쳐 주며 맨발로 모래밭을 뛰어도, 옷이 다 젖도록 물장난을 해도 그러려니 한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마음껏 놀아도 된다, 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아기 아이들을 둔 부모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와 함께 놀기’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실컷 놀 수 있게 하는 것뿐 아니라 아이와
함께 옷 적시고 버려가며 뛰어 놀 수 있는 자세. 아이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아이와 함께 웃고 떠들며
놀기. 나는 그런 것들을, 다른 데서가 아니라 <페파피그(Peppa Pig)>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고 배웠다.
페파와 페파의 남동생 조지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비 온
뒤 생긴 물 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며 노는 것인데, 엄마는 “더러워지니
하지 말라”는 말 대신 장화를 갖다 주며 장화를 신고 뛰라고 말한다.
비오는 날 비를 맞으며 물 웅덩이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도 엄마는 “안 돼”라는 말 대신 비옷과 방수모자를 건네주며 나가라고 한다. 진흙 범벅이
된 이 개구쟁이 아이들이 아빠에게 “아빠, 우리 뭐 하고
왔게~요?”하고 물으면 아빠는 자못 진지하게 “음..TV를 봤니?” 하고
받아치고, 아이들이 진흙놀이를 했다고 밝히면 태연히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겨우 진흙인걸 뭐. 닦으면 돼.”
그리고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엄마 아빠 모두 장화를 신고 나가 커다란 물웅덩이에서
뛰어 논다.
» 페파피그 사이트 갈무리.
엄마가 팬케이크를 구울 때 “반죽을 더 높이 던져 올려야지 여보!” 하고 타박하던 아빠가 너무
과하게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바람에 팬케이크가 부엌 천장에 들러붙는 장면은 또 어떤가. 아이들이나 할
법한 행동을 아빠가 더 나서서 하고, 그런 아빠를 보고 와하하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재미난다. 천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팬케이크를 떼어내기 위해 엄마와 아이들이 이층 침실에 가서 쿵, 쿵, 하고 몇 번이나 점프를 하는 그 다음 장면은 또 어찌나 기발한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그림을 구상했을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라 또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이 부엌 놀이며 의사 놀이를 하느라 분주하면 어른들도 거기 끼어 맞장구를 치며 놀고, 오히려 그런 어른들에게 “에이 아빠, 이거 그냥 놀이에요 놀이! 내가 진짜 의사가 된 게 아니라고요!” 하고 타박하는 아이들 모습도 재미있다.
이 <페파피그> 시리즈는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온 가족이 와하하 웃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나는 특히 그 장면을 좋아한다. 온 가족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흔들어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저렇게 같이 와하하 웃고 뒹구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거란 생각을 한다. 결국 아이를 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아빠
엄마가 아이와 함께 얼마나 자주 행복하게, 즐겁게 온 몸 온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느냐, 가 아닐까.
최근 한 2주, 바쁜 남편과 부쩍 더 자라버린 아이 사이에서 마음이 좀 힘들던 때에 나는 이
<페파피그>를 더욱 자주 떠올렸다. 어린
아이들과 놀기엔 너무 커버린, 하지만 그렇다고 형, 누나들과
놀기엔 아직 너무 어린 만 두 살 반 아이에게 요즘 나는 유일무이한 놀이 동무이자 노예(?!)다. 자동차 놀이도, 물놀이도, 점프도, 우다다 뛰기도, 미끄럼틀 타기도,
모래놀이도 ‘같이’ 하기를 원하고, 실내 놀이도 꼭 ‘상대’가
필요한 전화놀이, 병원놀이,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집안일을 할래도 꼭 옆에 붙어 “내가!” 를 외치는 덕분에 설거지도 청소도 요리도 모두 ‘같이’ 해야 한다. 가뜩이나 내 개인 시간은 하루 두 시간 남짓밖에 나지
않는 상황이다보니 책 한 장 못 읽고 글 한 줄 못 쓴 채 하루를 넘기는 때도 다반사다.
아이가 밉고 내 신세가 처량해지던 찰나, 불현듯 나를 깨운 것 중 하나가 <페파피그>였다. 그래, 놀자. 아이와 놀아야 할 땐, 다른 거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려놓고 놀자. 억지로 책 한 장 더 읽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좌절되어 짜증내지 말고, 그냥 내려놓고 놀자. 그게 늘 쉬운 건 아니지만, 육아 햇수가 쌓여가며 깨닫게 되는 건 육아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건 ‘힘
빼기’라는 생각이다. ‘말 걸어주기’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대화하기’,
‘놀아주기’가 아니라 그냥 함께 ‘놀기’, 가 될 때, 어른이기에, 부모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욕심, 불안, 조급함, 간섭하고 싶은 마음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아이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아이도 부모도 순간 순간을 온전히 기쁘게 누리며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니 놀자. 아이와 놀 때만큼은 유치하게, 여유롭게, 온 몸으로 놀자. 페파네
가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