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일본은 더워도 너무 덥다.
아침밥을 겨우 차려먹고 온도와 습도계가 함께 달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실내온도가 28도, 습도는 70%에 달하고 있다.
온도, 습도 모두 '쾌적함'의 한도를 벗어나 있다.
한낮으로 갈수록 양쪽의 수치는 점점 더 오를텐데
나날이 혈기왕성해지는 두 아이와
오늘 하루, 또 어찌 보내나.
그럭저럭 허덕이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들어갔더니
부엌 온도는 31도까지 올라 있었다.
하긴 일본은 매일 바깥온도가 35,6도를 기록하고 있으니;;
31도 속에서 더운 밥을 지으며, 1/3쯤 지나온 여름방학을 떠올린다.
두 아이가 방학식을 하자마자 우리 가족은 부산에 다녀왔다.
네 식구가 함께 가는 것은 꽤 오랜만이기도 했고, 오빠네, 남동생네 식구들이
모두 함께 모이기로 해서 여러모로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즐거운 여름방학을 지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동안 계속 몸이 편찮으셨던 친정아버지께서 다니실 병원을 새롭게 알아보고
여러가지 일들을 의논하기 위한 가족모임의 의미가 더 큰 자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이 완전체가 되어 즐겁고 행복했지만
아이들이 지겨워하지 않고 놀 수 있도록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마침 닥쳐온 친정엄마, 아버지 생신을 준비하느라 대식구가 함께 할 식당을 물색하고,
짬짬이 남는 시간에는 병원 의사들과 상담을 하거나 입퇴원 수속을 위해
병원 원무과를 전전해야 했다.
식구들이 많으니, 누군가가 병원일을 볼 때, 누군가는 운전을 해 주고,
누구는 아이들을 해운대 바다로 데려가 실컷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놀려주고,
또 누구는 부모님 생신 준비를 위해 식당을 예약하고 케잌을 준비하고,
집에 남은 누구는 산더미같은 빨래를 빨고 집안을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
일들을 나눠서 할 수 있었던 게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는 늘 마음이 바쁘긴 했지만 시간이 나는대로,
미리 계획되어있던 일도 하고, 친구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알차고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여행 마지막에는 아이들이 아빠들과 영화도 보러 가는 잠깐의 여유도 있었고,
걱정했던 병원일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걱정했던 일들이 어느정도 일단락되고,
아이들과 남편도 오랜만에 할머니할아버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나는 습도가 높은 일본의 무더위에서 잠시 벗어나 시원한 바람이 너무 좋은
부산의 여름을 만끽할 수 있어 엄청 기분전환이 되었지만..
친정에서 지낸 일주일동안 내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열 명이 훨씬 넘는 대식구의 삼시세끼를 준비해야 했던 친정엄마..
요즘들어 집안일을 부쩍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위해
되도록 밖에서 먹고 들어가기도 하고, 함께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시켜먹기도 했지만
부엌일을 남에게 잘 맡기질 못하시는 엄마는 우리 3형제 식구들이 머무는 내내,
아침마다 믹서기에 과일과 야채를 갈아 쥬스를 만들고,
찌게와 국을 번갈아 한 솥씩 끓이고 더운 밥을 짓고,
땀을 뻘뻘 흘리시며 전을 굽고 나물을 무쳐내셨다.
후식으로 간식으로 과일을 종류별로 준비하고,
아이들을 위해 떡이나 과자, 아이스크림을 때마다 꺼내주셨다.
외국에서 오랜만에 온 사위도 있고, 요즘 몸이 아픈 며느리도 있고,
무엇보다 할머니집에 기대에 들떠 찾아온 손주들이 너무 이뻐서
엄마는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이셨을 것이다.
부지런히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챙기셨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엄마 입 주변이 부르터 염증이 나 있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휴..
누구에게라도 여름날의 부엌 노동은
고단하고 체력이 심하게 소모되는 일이다.
31도까지 오른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며,
우리땜에 힘드셨을 친정엄마를 생각하니
여름에 누가 차려주는 밥상은 다른 계절보다
훨씬 소중하고 감사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간소하게 아이들의 저녁밥을 차려주고 나니,
정작 고생한 나는 밥맛이 없다. 힘들여 우리에게 한 상을 차려주시고
먼저 먹으라고만 하시고 함께 수저를 잘 들지 않으시던
친정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밥맛이 없으셨을까..
이런 날은
엄마들만 모이는 심야식당이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이들 다 재워놓고, 밤12시 하루의 더위가 조금 가시고
밤바람이 선선한 거리를 걸어 후미진 골목의 식당문을 드르륵 열면
하루의 육아노동을 마친 엄마들이 모여 제대로 된 밥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식당.
마스터는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의 박혜란님이나
얼마전 <엄마를 졸업하다>를 쓰신 김영희님이면 좋겠다.
(나보다 훨씬 더 부엌노동에 지치셨을 이 분들에게 음식을 주문하다니..;;
부엌일은 로봇에게 맡기고 이야기 상대만 해 주셨으면.. 하는 상상을 제멋대로 해 본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거나 좋으니 '정식'을 주문하고 싶다.
밥과 국, 메인반찬과 서브반찬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정식.
그런 밥을 먹으며 다크서클이 발밑까지 내려온 옆에 앉은 엄마와
심야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고 싶다.
그러고 나면 힘이 좀 나지 않을까..^^
* 한여름에 아이 키우느라 수고하는 엄마들, 모두모두 화이팅입니다.
베이비트리가 엄마들의 심야식당 같은 존재가 되었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