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속닥속닥게시판에 반가운 글 하나가 올라왔다. 작년에 베이비트리에서 주최한 편지 공모전에 자폐 진단을 받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려 주셨던 한 엄마의 글이었다. 그 동안 이 엄마는 그 편지에 담은 약속대로 아이에게 세상으로 향하는 을 내어주는, 엄마 스스로 기꺼이 그 창이 되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오신 듯 했다. 그 창 내는 이야기를 베이비트리에서 함께 나눠보고 싶으시다고 했다. 진심으로 반가웠다. 평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글로, 이야기로 풀어내어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산다면 우리가 사는 곳이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풍요로운 세상이 될 거라 믿는 나로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 기뻤다.

 

첫 인사 후 처음 정식으로 올려주신 글(자폐, 잠재된 창조력)을 읽고, 나도 몇 달 전 내게 큰 깨달음을 준 경험 한 토막을 나누고 싶어졌다. 나는 주말에 한 단체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데, 그 중 형제가 나란히 자폐 진단을 받은 경우가 있다. 한 아이는 걷고 뛰는 걸 좋아해서 가만히 앉아있는 교실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그 아이의 동생은 말이나 행동 없이 엄마에게 안겨 있기를 좋아해서 역시 교실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 이 아이들은 교실에 잠깐씩만 머물다 밖으로 나가곤 한다. 이 둘 중 형인 아이가 내가 맡은 반에 속해 있지만 이 아이와 이렇다 할 얘기도 한 마디 못 해봤다. 그저 마주치면 안녕, 이튼? 하고 인사나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학년 교실에 투입될 성인 인력이 모자라 내가 대신 들어가게 됐고, 그 교실에서 처음으로 이튼의 동생 콜린을 가까이에서 만났다. 그 날 우리 앞에는 색색의 도화지와 사인펜, 색연필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 각자가 자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시간이었다. 가족과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가족 중 누구와 가장 친하고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 가족이 좋을 땐 언제고 싫을 땐 언제인지 등을 그림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교실에 들어온 콜린이 엄마 품을 떠나 내 옆에 와서 앉았을 때,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나는 콜린이 엄마에게 안겨 있는 모습만 봤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가 내 손을 덥석 잡고서는 제가 원하는 색깔의 펜을 내게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손에 땀이 확 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긴장하거나 집중하면 손에 땀이 많이 난다) 얼떨떨한 채 멀뚱 앉아 있는 내게 콜린은 난데없이 이렇게 말했다. “A!”

 

? A? 알파벳 A?

 

뭐지? 하는 갸우뚱한 표정으로 콜린의 엄마를 쳐다봤지만 이 엄마는 웃으며 끄덕끄덕, 하기만 할 뿐 뭐라 말이 없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화지에 A를 썼다. 그랬더니 아이는 다시 내게 “A!” 하고 외쳤다. 바로 옆에 다시 A를 쓰려는데, 콜린이 내 손을 꽉 잡고는 아니아니, 도리질을 한다. 그리고는 내 손을 제 손으로 잡고 멀찍이 옮겨 다른 곳에 가져다 놓는다. 그곳에 A를 썼다. 그 다음 주문은 (bar)’ 였다. 두 개의 A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서는 (string)’ 두 개를 그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줄 두 개 사이에는 의자(seat)’를 놓아야 했다. 여기까지 그리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이가 그려낸 것이 다름아닌 그네였다는 것을.

 

그렇게 아이는 놀이터의 놀이기구를 하나 하나 그려냈다. 비록 아이의 지시대로 내가 그린 것이지만 말이다. 그네, 미끄럼틀, 시소, 잔디밭을 차례로 그린 다음, 그네에는 사람도 하나 태웠다. 사과 나무도 그렸다. 이윽고 아이는 미끄럼틀 그림 위에 펜을 쥔 내 손을 가져다 놓고는 위이이~~”하고 소리를 냈다. 뭔가 했더니, 펜으로 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곧 미끄럼틀 위에는 색색깔의 물결이 그려졌다. 아이의 위이이~~~~”소리에 맞추어 물결 모양을 그리며 펜으로 미끄럼틀을 탔다. 중간중간 특정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아이는 제법 오랫동안 차분하게 앉아 나와 그림을 그렸다. 수업이 끝날 때쯤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놀이터 그림이 두 장이나 완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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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집에 온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콜린과의 그 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비록 의학적으로 자폐 진단을 받은 건 콜린이지만, 어쩌면 진짜 자폐는 나를 포함한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걸 표현해 낼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는 걸, 그 전에는 몰랐다. 난데없이 A! 하고 시작된 뜬금없는 외침이 색색의 물결이 되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즐거운 시 한편으로 끝날 줄은 정말 몰랐다. 이 아이가 갖고 있는 이야기, 능력, 마음, 그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건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향해 눈을 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 건 아닐까. 닫힌 마음, 닫힌 시야. 이게 자폐가 아니라면 뭔가.

 

분명 콜린 같은 아이들에게도 자기만의 능력과 방법이란 게 있다. 뜻밖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순간도 있고, 창의력까진 아니더라도 여느 아이들처럼 많은 배움과 연습을 통해 어떤 기술을 연마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능력과 방법을 알아봐주는 편견 없는 눈과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그리고 그에 따른 관심과 지원일 것이다. 발달장애가 있다는 것은 자라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더디게 자랄 순 있어도, 아이는 누구나 자란다. 발달장애 아이들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는 것뿐이다. ‘여느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명심해야 할 것은 내 아이도 남의 아이도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자기만의 색깔로 자란다는 사실이다. 남의 아이가 어떤 이유로 더디 자란다고 안타까워하거나 거리를 두려 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내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뒤처진다고 조급해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우리의 자폐상태를 벗어나려 부단히 애써야 한다. 부모가 된 이들이 이런 생각과 마음을 널리 공유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내 아이도 남의 아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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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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