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열일곱 살이었다. 하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짝반짝 눈이 부셨거늘 소년은 잘 생긴 연예인이며 옷 잘 입는 연예인, 연인 삼고 싶은 연예인 같은 시시한 설문조사에서 죄 1위를 차지, 과장 좀 해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해도 영 빈 말은 아닌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많은 시시한 설문조사에서 (마음으로) 늘 소년에게 한 표 던지고 마는 흔한 대중 중 하나여서 그 애가 자주 쓰는 말은 어느새 내 유행어가 됐고 그 애가 빠진 취미는 어느새 내 관심사가 됐으며 그 애의 스타일은 내 패션 교본이 됐다.

 

하여 청바지에 하얀 벨트라거나 커트 머리에 빨간 두건, 긴 팔 티셔츠와 반팔 티셔츠의 레이어드 룩 같은 안 하느니만 못한 시도를 나 좋을 대로 하였으니.

 

 “언니, 그 애랑 같은 옷차림 말고 그 애가 좋아하는 옷차림을 해야죠.”

 동생의 혜안이 없었던들 나는 가서는 안 될 패션의 길을 얼마나 더 달렸을 것인가.

 

“여성스러운 옷차림이 좋아요.”

그 애는 기억도 못할 어느 하루의 인터뷰가 내 패션의 분수령이 됐다. 자아라는 것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대량의 치마를 사들이며 나는 여성스러운 옷차림의 세계에 마침내 입문했다. 물론 치마를 입는 것과 여성스러워지는 것은 별개라는 것쯤, 진즉 알고 있었지만 만날 일 없는 그 애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 것만으르도 그 애와 가까워진 기분에 흡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늘 그렇듯 열기는 식어갔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관통해 사계절을 너머 사랑을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돌은 언제나 좋지만, 결코 그 때만큼은 좋을 수 없는 사랑으로 빛 바래갔다. 문득 ‘그 뜨겁던 사랑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아련하게 떠오르는 날이 잦았지만 그 뿐이었다. 허구가 아닌 현실의 사랑이 내게는 중요해졌다.

 

아들이 태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뜨거웠으나, 마침내는 싸늘해졌던 사랑이 좌심방 우심실에서 묵은지처럼 숙성이라도 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아들에게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입히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예상 못한 기묘한 집착이었다.

 

제 두 손으로 단추를 꿰지 못하는 아이에게 패션이 어인 말이오, 애한텐 싸고 질 좋은 옷이 최고요.라는 철학을 가졌었거늘 나는 돌잡이 아이를 위해 검은 색 아디다스 파이어버드를 주문했다.

내 안에, 그 애의 패션을 완성해보지 못한 미련이 그토록 깊이 절절하게 도사리고 있는 줄 이십 년이 가까워지도록 모르고 있었다.

 

부모란 자신의 꿈을 아이에게 투영시키는 존재라더니, 나는 아디다스의 반팔 티셔츠와 바람막이, 줄무늬 레깅스, 패딩 재킷, 운동화를 사들였다. 증상을 눈치 챈 친구나 친지가 이왕이면 아디다스!라며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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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아디다스는 소년, 내 20세기 최후 아이돌의 시그니처 브랜드였다.

삼선이 선명한 아디다스 트랙 탑 차림의 그 애는 데이비드 베컴보다 근사했다, 정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연히 포착된 그 애는 자주 아디다스를 입고 있었기에 내 머릿속에 그 애=아디다스=그 애라는 공식이 인지하지도 못한 새 깊이 각인이 됐던 모양이다.

 

소년은 이제 면도가 귀찮아, 다듬지 않은 수염을 한 얼굴로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됐다. 여전히 오랜 팬과 지지층을 갖고 있지만 환호의 중심에서는 꽤 멀리 벗어나 있다. 때로 인터넷에 "한 때 이 사람이 아이돌이었다는데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이 첨부 사진과 함께 올라오는데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이들이 썼음이 분명한 "헉? 설마?"라는 댓글도 자주 달린다. 가끔은 ‘이 얼굴도 아이돌?’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역변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단 한 번도 빛나는 별 아니었던 적 없는 소년이다. 하늘의 별은 늙어도 별 일 터이니 십 년이 더 지나 얼굴의 반을 웃자란 수염이 덮고 깊게 팬 주름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해도 내 안의 그 애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다.

 

그렇다 하나 다른 이유도 아니고, 최전성기 시절의 소년을 추억하며 아디다스에 집착하는 게 옳은가 하면,

 

 

그는, 한때 아디다스에서 파견한 소년 같았던, 이제는 아저씨가 된 그는 최근,

출연한 연극의 성공을 축하하며 연출진, 출연진 전원과 특별 주문 제작한 금색 나이키(스포츠 패션계의 양대 산맥, 아디다스의 라이벌이 아니오!)를 신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됐다.

무에요, 그 애가 한 적도 없는 약속을 어긴 듯한 가벼운 배신감이 드는 것은!

그래, 사실은 그 애는 아디다스에 집착한 적이 한 번도 없을거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자주 아디다스였을 뿐인지도. 그러하니 아저씨가 돼 버려 이제는 그 애조차 입지 않는 아디다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게 맞지 싶다.

 

아디다스를 떠나 보내며 소년에게 편지 몇 줄 써 본다.

 

그리운 아디다스 시절의 소년에게,

내 곧잘 그대가 나보다 일찍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까 저어했다오.

무사다행으로 내가 그대보다 일찍 결혼을 해 아이도 낳고 가정도 꾸렸소.

그래서 말인데, 슬슬 그대도 마흔이 가까워지지 않소? 그러하니, 이즈음 그대가 결혼을 한다 하면 내 멀리서나마 축복을 하겠소.

이 나이에 입에 담기도 원, 쑥스럽소만 새벽의 기운을 받아 말하자면, 변함없이 사...사랑하오. (나보다 십만 배쯤 잘 지낼 것 같소만) 부디 행복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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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나이 마흔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남들 한 마디 할 동안 열 마디 한다며 타박 받을만큼 급하고 남 이야기 들을 줄 모르는 성격이었거늘, 걷고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늦된 아이를 만나고 변해갑니다. 이제야 겨우 기다리고, 세상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에게 처음 다가온 특별함,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의 이야기가 따뜻함으로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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