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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케이티는 새로운 낱말을 하나 배웠다. 무지개를 뜻하는 레인보우라는 단어가 그것이다.평소 즐겨보는 한 애니메이션에서 무지개가 나오는 장면을 본 뒤였다. 자주 가는 작은 놀이터 옆에 야트막한 잔디언덕이 있고, 그 위에 오색 바람개비가 하나 꽂혀 있는데 그게 아이 눈엔 무지개 같아 보이는 모양. 아이는 놀이터 근방에 도착하면 레인보우, 레인보우하고 신이 나서 중얼거린다. 그래서인지 유독 요즘 내가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썸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하고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 말이다. 사실 가사는 첫 소절밖에 모르고, 멜로디만 좀 아는 정도여서 가사 전체를 한번 찾아봤더니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감히 꿈꿔왔던 일들이 정말로 이뤄지는 곳”(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역을 맡은 주디 갈랜드가 불러 오랫동안 사랑 받았던 이 노래는 미국에서 특히 6월이 되면 자주 회자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6월은 성 소수자의 달’(Gay Pride Month)이고, 주디 갈랜드와 주디가 불렀던 오버 더 레인보우는 언젠가부터 성 소수자들의 상징 같은 것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겁 많은 사자는 여성성이 좀 더 두드러지는 남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사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친구가 되어 함께 길을 나서는 도로시의 모습이 그 당시 미국의 성 소수자들에게 큰 위안이자 희망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당시 성 소수자들 사이에서는 도로시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이 그들 사이의 암호로 쓰였고, 1969 6, 뉴욕의 한 술집에서 경찰의 기습 단속에 저항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날은 공교롭게도 바로 주디 갈랜드의 장례식 다음 날이었다.    

 

이런 이유로 원래 미국에서 6월은 성 소수자 권리 관련 이야기가 자주 나오게 되는데, 올해 6, 미국에서는 감히 꿈꿔왔던 일들이 정말로 이뤄지는무지개 너머의 세상이 열렸다. 바로 며칠 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 인디애나 주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는 동성결혼 허용 결정이 엎치락 뒤치락 했고, ‘신앙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성 소수자들을 면전에서 차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안이 통과되어 한바탕 전쟁을 치른 터였다. 그런데 마치 선물처럼, 6월 성 소수자의 달 그 끝자락에 연방 대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이다. 바로 내 주변에도 동성결혼을 했거나 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몇 있어서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기쁜 일이다.

 

사실 나는 몇 년 전 지금의 남편과 연애할 때 털어놓은 대로, 나 스스로를 양성애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성 소수자 문제에도 좀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들의 수만큼 나를 좋아했던 여학생들이 있었던 걸 보면, 내게 그런 기질이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다만 한번도 내가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 동성과 연애를 해 본적이 없었던 이유는, 첫째, 내게 그런 기질이 있다는 것을 이십대 중반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고 둘째, 여느 이성 연애와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스타일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성과 서너 번의 연애/준 연애를 하고 난 뒤였던 스물 두어살 무렵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중학교 1학년 겨울, 전학 간 학교에서 짧게 알았던 한 친구와 헤어지는 일이 내겐 첫 이별의 경험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그 아이를, 후에 다른 남자친구들을 좋아했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좋아했고, 이별 역시 이성연애의 이별과 비슷한 강도로 겪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너무 늦게 깨달은 탓(?)다수의 삶에 속하는 이성애자로 살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지만, 나는 무지개 너머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이성과 동성 누구를 사랑해도 비난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을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한다. 온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반쪽을 만났는데, 그 반쪽이 동성이면 어떻고 이성이면 어떠랴. 이성과의 만남과 사랑이 얼마든지 부정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과의 만남과 사랑도 얼마든지 진실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옛날 아리스토파네스는 우리가 반쪽을 그렇게나 찾아 헤매게 된 것이 옛날 옛적 인간들이 여덟 개의 팔 다리로 세상을 제 맘대로 휘젓고 다니다 벌을 받아 반으로 쪼개져 그런 거라고 했다. 내가 태양의 자손인지, 지구의 자손인지, 달의 자손인지는 나머지 반쪽을 만나 양 팔, 양 다리, 그리고 배꼽을 꼭 맞춰 대어 봐야 알 수 있는 법. 내 반쪽도 제대로 간수 못하면서 남이 찾은 반쪽에 왈가왈부 하다가는,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다시 반으로 쪼개지리라.       

 

오색 바람개비를 들여다보며 레인보우, 레인보우하고 노래하는 아이를 다시 바라보며, 나는 그동안 노랫말 속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저 무지개 너머의 세상이 무지개 이편, 내가 발 딛고 선 땅에 다가오고 있음에 감사한다. 피부색이 달라도, 한쪽 다리와 발이 크고 길어도, 장애가 있어도, 동성을 사랑해도, 가난해도, 모든 사람이 그 존재 만으로도 귀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이 힘겹고 더디지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내 아이가 편견 없이 차별 없이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려면, 다른 아이 역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 아이에게 (겉으로 보기에) 아빠만 두 명 있고, 엄마만 두 명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 받지 않고 즐겁게 보람 있게 살 수 있으려면, 다른 아이 역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 아이가 스스로를 성 소수자로 명명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일곱 빛깔을 마구 섞어 까맣게 덮어버리거나 일곱 빛깔을 모두 지워 하얗게 만들기보다는 그 빛깔 하나 하나 그 고유한 색을 맘껏 뽐낼 수 있는 세상, 우리 모두가 그런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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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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