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부터 아빠 2아웃으로 해줄게.”

계속되는 연패 덕에 부자 야구 룰 조정의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

녀석은 지금까지 1아웃으로 한정했던 내 공격권을 2아웃으로, 두 배 올려주겠다고 말했다.

사실은 지난번 패배 뒤 내가 슬쩍 운을 띄운 터였다.
 
‘그래, 그러자’라고 낼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일단 오늘까지만 1아웃으로 할게.”
 
자존심이라고 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녀석은 여덟살, 나는 마흔살. 지금까지 먹은 밥 그릇수로만 쳐도 5배다.

야구를 시작한 구력은 더하다. 대략 나도 여덟살 때 서울 변두리 공터에서 야구를 시작했으니

야구 인생 어언 32년. 녀석은 아무리 쳐줘도 2년이니 이건 16배다. 이런 걸 다 감안하면

나의 공격권을 녀석의 3분의 1로 제한하는 건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공격권이 2배로 늘면 승부의 추는 급격하게 내 쪽으로 기울어질 게 명확했다.

(음...나만의 착각인가)

그렇게서라도 녀석을 이기고 싶지 않았다.

정말 3분의 1의 공격권으로 녀석과 대등하게 경기할 수 없는 건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이 대의명분,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정신력은 8차전 경기 결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구석구석을 찌르는 나의 칼날 제구가 오랜만에 빛을 발했다.

낮게 들어오는 스트라이크는 좀처럼 녀석에게 장타를 허용하지 않았고

2스트라이크 이후 슬라이더로 삼진 여러 개를 잡았다.

타격에서는 볼넷을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진루타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1회에 2점, 2회에 4점, 3회에 6점, 4회에 2점을 뽑아냈다.

6회초 녀석의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14-6.

 

20150531_092425.jpg » 연속안타를 맞고 씩씩거리는 모습
 
사실 경기가 잘 풀릴 때는 경기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대량실점을 하면 녀석은 심기가 불편해진다. 입꼬리는 내려가고 콧구멍은 벌름거린다.

예전 같으면 그럴 때 ‘봐주기’, ‘져주기’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냥 좋은 공을 던졌을 때 “오! 이번 공 좋았어”라고 설레발을 치는 수밖에.
 
여튼 6회초 녀석의 마지막 공격. 3타자 연속 안타로 녀석이 따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삼진으로 2아웃을 잡아냈다. 14-10, 2아웃 만루 상황.

낮은 공으로 초구를 던졌고 녀석이 쳤다. 평범한 원바운드로 나한테 온다.

흐흐. 이렇게 아름답게 끝이 나는구나. 공을 잡아 1루로 던지려는데

공이 글러브를 맞고 튕겼다. 0.00001초 방심한 나의 실수. 점수는 14-11, 3점차.
 
다시 정신을 차리고 타자를 맞이했다.

2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낮은 직구로 승부구를 던졌는데 녀석의 통타.

전투기처럼 공이 펜스 근처까지 슝하고 날아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공을 잡으러 갔다.

분명 2루타성이었는데 녀석은 2루를 지나 3루로 뛰고 있었다.

난 3루로 공을 던졌다. 내 공이 빨랐다. 3아웃. 8차전 끝.
 
“야, 왜 욕심을 부렸어. 2루에 있었어야지.”
 
나는 웃으면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녀석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에서도 씩씩거리는 게 보였다. 집에 들어와서도 멍하니 앉아 분을 삭이고 있었다.
 
“아웃돼서 속상해? 아웃 아닌 거 같아?”
 
“나 혼자 생각하는 거거든?”
 
녀석이 한 대 칠 거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오늘 패배의 원인을 혼자 분석하고 복기하며 자책하는 분위기였다.

그 표정을 사진으로 남기려 하니 찍지 말란다. 도촬이라도 하고 싶은데 못했다.
 
30분 정도를 면벽수양하듯 그렇게 앉아있던 녀석은 한바탕 씻고 나더니

텔레비전에서 <아기공룡둘리>를 보고 있다. 마음의 정리가 됐나 보다. 다행이다.

 

20150531_111848.jpg » 아기공룡둘리는 누가 봐도 재밌나 보다
 
내가 오늘 아이와의 승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를 쓰고 이기려했던 이유는 철없는 승부욕 때문이 아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지고 있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이며 이기고 있다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졌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다음의 명승부를 기약해야 한다.

인생도 그래야 하니까.

 

 

*개인 블로그에 올린 5월31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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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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