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겨레 토요판에 실렸다는 한 남성의 하소연을, 나도 뒤늦게 찾아 읽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이 아빠의 심정에 너무나도 깊이 공감했다. 이 아빠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 그러니까 하루 종일 재잘대는,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다. 전직 영어학원 강사로서 나는 이런 직종에 있는 사람들의 고충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일하던 곳은 회화 전문(이라고는 하지만 소형 학원들이 다 그렇듯 학교 내신까지 봐 줘야했던) 학원이었는데, 12시에 출근해 1시부터 초등학교 1, 2학년 수업을 시작으로 밤 9시 중학교 3학년 아이들까지 쉴 틈 없이 상대해야 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연이어 수업이 있어 저녁 식사 시간 30분을 제외하고는 딱히 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퇴근을 하면, 버스에 올라 타는 그 순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진공 처리 된 방에 혼자 두 시간만 가만히 앉아 있었으면 딱 좋겠어.”

아이를 낳고 나서 한동안 내가 남편에게 하소연한 주된 내용이 바로 이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기분에 관한 거였다. 하루 종일 내게 안겨 웃고 울고 징징대고 요구해대는 아이를 돌보며 나는 학원 일을 하던 때를 다시 떠올렸다. 그 때는 그래도 퇴근을 하면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었는데,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24시간 계속되는 일이니 잠자는 시간 빼고는 그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아이가 뒤척이거나 깨서 울면 달래고 먹이고 재워야 하니 도무지 나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있을 수 있는 때가 없었다. 문득 문득 아이가 내는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혼자 상상하곤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빈 방이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날에는 남편과도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 밤잠을 재워 놓고 나서는 남편에게도 아무 말 안하고 혼자 이어폰을 꽂고 미드를 봤다. 그러나 신생아케이티는 내게 30분의 미드 시청도 허락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첫 일년, 내 생활이 그렇게 모조리 아이를 위해 바쳐지게 되자 남편의 생활이 부러운 날이 많았다. 남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하느라 힘들어도 즐겁고 보람 있고 좋지 뭐, 나는 이게 뭐야, 싶었다. 남편은 수업 듣고 강의 하고 책 읽고 글 쓰며 지적 활동을 맘껏 하는데, 나는 영어도 한국어도 베이비톡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이걸 어째, 싶었다. 남편은 스피치 클럽 활동을 열심히 해 지역 대회에도 나가는데, 나는 하던 스피치 클럽 활동도 임신 중반 들어서면서부터 못 나가게 된 것도 속이 상했다. 남편은 학교에서 수업하고 일하느라 바빠도 짬짬이 공강 시간도 있고, 그럴 땐 혼자 조용한 공간에서 쉴 수도 있는데 나는 어딜 가나 아이와 함께니 도무지 혼자일 수가 없는 게 화가 났다.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여 짜증이 나도 그 짜증을 아이한테 풀 수는 없으니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 남편을 붙들고 징징대기 일쑤였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고도 남는 사람이었고,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병행하며 1년을 버텼다.

  

그렇게 첫 일년을 정신 없이 보내고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자, 남편이 내게 제안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한번씩 두어 시간, 어디라도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오라고. 물론 내게 그렇게 제안하면 나도 남편에게 그런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기브 앤 테이크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우리 부부의 데이 아웃(Day Out), 나잇 아웃(Night Out)제다. 미국에는 아이를 떼어 놓고 여자들끼리 모여 노는 여자들의 밤’, 남자들끼리 모여 노는 남자들의 밤같은 것들이 있는데, 우리도 우리끼리 그걸 해보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원래 산 타는 걸 좋아하는 바깥형인데 이 동네엔 산이 없어서 등산을 할 수가 없으니 그 대신 자전거를 타고 동네 숲, 호숫가에 바람 쐬러 갔다 오는 걸 좋아한다. 반면 나는 뭘 해도 실내에서 하는 걸 더 좋아하는 실내형이라, 남편이 어디라도 나갔다 오라고 제안하면 나는 책 한권 들고 집 근처 커피숍에 나가 책을 읽다 오는 걸 즐긴다. 그마저도 귀찮을 땐 그냥 침실에 들어가 문 꼭 닫아놓고 혼자 엎드려 책을 읽는다. 가끔은 스케일이 커지기도 한다. 남편은 학교의 저렴한 여행 프로그램을 이용해 1 2일로 타주에 견학 겸 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고, 나는 친구를 따라 시카고 당일 여행 겸 컨퍼런스 참관을 다녀왔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뮤지컬 공연, 합창 공연을 보고 오면, 남편은 혼자 동네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왔다. 남편이 친구와 동네 바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오면, 나도 친구와 같은 바에 가서 술을 한잔 했다. 그렇게 상대방이 나가 있는 동안, 집에 남은 사람은 아이와 밥도 해 먹고 놀러도 가고 아이 낮잠, 밤잠도 재운다. 상대방이 그렇게 나가 있는 동안엔 서로 문자며 전화도 잘 하지 않는다. 그 시간만큼은 집에 아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게, 맘 편히 실컷 놀다(!) 올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친구와 술 마시며 수다 떠느라 밤 12시 넘어 집에 들어와 보니 남편이 빨래도 장난감 정리도 말끔히 다 해 놓고 아이 곁에서 잠들어 있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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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토요일 저녁,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아는 여자들(!)과 내 생애 처음 볼링을 쳤다. 볼링 핀 넘어가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날아갔다..>


물론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각자 자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평소 가사/육아 분담에 대한 협의와 실제 공조 체제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자 특정한 날에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꼭 미리 상의를 하는데, 나나 남편이나 흔쾌히 그래, 그럼 그 날 나갔다 와.”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데이 아웃, 나잇 아웃시간을 도입하고 유지하는 데 더 중요한 건, 각자의 생활/양육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다른 무엇보다 서로 상대방의 노고를 인정하는 태도인 것 같다. 사실 우리 사이에 이런 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솔직히 나는 남편을 좀 못미더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집안일은 잘 하지만 아이 돌보는 일에 관한 한 나보다 인내심이 떨어지는 남편이어서,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방식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실에 들어가 책을 읽다가도 남편이 아이를 돌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쉽게 아이의 요구에 타협을 하거나 격한 반응을 보인다 싶으면 바로 방 문을 열고 나가 남편에게 핀잔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 이래선 안되겠구나싶었다. 내가 온전히 그를 믿고 아이를 맡기지 않으면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나 스스로 망쳐버리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상대방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니만큼 이 때만큼은 아이가 아니라 온전히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고 배려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자기 일로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나를 위해 몇 시간씩 아이를 혼자 상대하고 있는 남편이니 그에게 편한 방식, 그가 즐거운 방식으로 아이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저 열심히 재미나게, 아이를 잊은 채 쉬고, 그렇게 재충전 된 새 마음으로 다시 아이를 기쁘게 볼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이번에 7주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가면서, 남편은 내게 작은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다음 학기에 학교 안팎에서 열리는 뮤지컬/연극 공연 목록이 담긴 책자였다. 7주간 자기 없이 혼자 고생하니, 다음 학기에도 틈틈이, 열심히 내게 나만의 시간을 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 보답하는 마음, 고맙고 즐거운 마음으로 뮤지컬 한 편, 연극 한 편을 찜 해 두었다. 공연 날짜는 아직 한참 멀었는데, 나는 벌써 기대가 된다. 혼자 느긋한 걸음으로 캠퍼스에 가 모르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공연을 볼 그 날이. 남편은 내게 공연 선물을 해 주고 또 무엇을 하겠다고 할까? 맥주 축제 구경가기? 바에 가서 밴드 공연 보기? 뭐가 됐든, 나는 또 흔쾌히 그래, 갔다 와!” 해야지.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들어오는 날엔 잠든 아이 얼굴이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쯤은, 두 말하면 입 아픈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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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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