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둘째의 소풍날을 까먹었다.
유치원에서 가정통신문도 오고, 문자도 왔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머리에 오징어 먹물을 한바가지 뒤집어 쓴 것처럼 까맣게 잊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바지, 윗도리, 양말, 책가방이 날라다니는 아침 전쟁터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있었다. 무사등교라는 최종목표를 향해 화차처럼 돌진했다.
그리고 비교적 무사히 아침 등교가 끝났다. 출근시간 무려 10분전에 도착해 상콤한 아침을 시작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찜찜함도 없던, 하필 그렇게 속없이 명랑한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 10시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내 한숨이 땅을 뚫었다. 그만 내 머릿통 위로 거대한 꿀밤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전화를 하신 둘째의 담임 선생님은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으셨다.
"어머니, 수연이가 오늘 소풍이에요. 혹시 잊으셨나요?"
지난 저녁, 외부미팅을 할 때 왔었던 문자가 그제서야 눈 앞에 떠올랐다. 난처했다. 둘째의 당시 상태를 듣고 나자, 난처함은 더 말도 못해졌다.
"아침에 친구들이 김밥이랑 과자를 자랑하는 걸 보고, 수연이가 많이 당황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안챙겨준 걸 알고 서운했나봐요. 너무 의기소침해져 있어요."
소풍날, 아침부터 색색의 김밥과 과자로 유치원에 젖과 꿀이 흘렀던 그 날.
나의 아기, 둘째는 젤리 한 봉 없이 광야에 서있었던 것이다.
광야에 서서 허허로웠을 아이의 마음을 떠올리자, 밤송이 같은 죄책감들이 뱃속을 굴러다녔다.
다행히 둘째의 선생님은 임기응변의 달인이셨다. 엄마가 회사에서 과자랑 김밥을 보냈다는, 뭔가 마법적인 해결책을 내셨다. 그리고 아이는 유치원에서 준비해준 먹거리로 소풍을 다녀왔다.
다섯살 인생, '눈치 백단' 불여우 스킬을 이미 터득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딸이다. 멋진 임기응변에도 찜찜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고 선생님이 살짝 일러주셨다.
의심을 해소해야한다. 퇴근하자마자, 나는 딸에게 활짝 웃었다. "엄마가 보낸 것 잘 먹었어?" 연극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자 아이는 얼굴을 환하게 펴며 "맛있었어" 하고 안겼다.
아, 나는 너무 황송했다.
내 손에 닿는 말랑하고 통통한 엉덩이가, 내 볼에 닿는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이. 엄마 사랑해라는 아이의 그 말이. 그리고 아이의 그 순진한 믿음이.
둘째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배와 같이 자라준 아기였다. 네살 때 잠깐의 반항기가 있었지만, 길지 않았다. 잘먹고, 잘자고, 잘싸는 황금 삼박자는 물론, 꼼꼼함과 사교성까지 갖췄다.
질풍노도, 파괴지왕, 호기심 대마왕 등 화려한 별명을 달고 다녔던 오빠와는 확연히 달랐다.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믿게해준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기꺼워하며 '안심'했다.
그러나, 이번 '빈손 소풍'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나의 안심은 어느새 무심으로 변해있었다는 것을. 이번 소풍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일들에 있어 나는 확실히 둘째에게 소홀해져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올해 들어 첫째의 입학은 나의 관심을 온통 먹어버렸다.
만약 첫째의 소풍이어도 나는 까먹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나는 쉽게 답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 뭐든 잘 알아서 하는 아이에게 신경이 덜 써지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관심은 기울여주세요. 아이들은 다 알아요. 그리고 그 서러움이 나중에 한꺼번에 터질 수 있어요."
유치원 선생님 말씀이 그 날 이후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랬다. 안심과 무심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안심에서 무심으로 넘어가버린다. '관심'이라는 울타리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