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소설 속 한 엄마가 있다. 희소질환에 걸려 죽어가는 둘째 딸을 살리기 위해 셋째를 낳았다.엄마는
이 아이를 낳기 위해 특정 유전 인자를 갖춘 배아를 특별히 선택해 임신했다. 그렇게 태어난 ‘유전자 맞춤형 아이’는 언니가 아플 때마다 함께 병원에 들어가 주사를 맞고 시술을 했다.엄마에게는 물론이고 아이에게도 그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언니를 사랑했고,언니에게 필요한 신체조직과 혈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더 이상은 언니를 위해 시술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엄마는 충격을 받는다.
여기 실제 존재하는 또 한 명의 엄마가
있다. 하버드 대학에서 남편과 함께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중 계획에 없던 둘째를 임신하게 됐다. 하버드 생이 학업 중에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는 것이 굉장한 수치이자 앞으로의 학문적 성공에 중대한
걸림돌로 여겨졌던 1980년대, 이 엄마의
뱃속에는 심지어 다운증후군 진단을 받은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담당 의료진과 부부의 지도교수는
당연하다는 듯 낙태를 권했다. 그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엄마는 두려움과 번민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판단과
감각을 믿고 끝까지 아이를 키워 낳았다.
이 두 엄마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첫 번째 엄마의 경우,셋째
아이가 자신을 상대로 벌인 그 소송이 사실은 아픈 둘째 아이의 부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아이는
동생의 생명에 기대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의
입을 빌어 호소했다. 죽음이 두렵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가는 것 역시 내겐 어떤 의미도, 행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엄마가 마주한 진실은 다운증후군 아이도 평범한 아이 못지 않게 행복하게, 느린 듯 모자란 듯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과 속도로 배우고 익히며 산다는 것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장애아의 가족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깨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이 두 책을 연이어
읽으며, 우리의 ‘행복’을 누가, 무엇이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한 아이의 엄마로서, 내 아이 케이티의 행복에 대해, 다음
세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이의 행복은 아이가
자신의 삶,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갈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부모는 결국 그것을 가족 안에서 돕는 사람일 따름이고, 사회
역시 그것을 돕거나 방해할 따름이다.
내가 읽은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한 가지를 뼈 아프게 지적한다. 아이의 삶, 아이의 미래, 아이의 행복은 엄마가 대신 만들어줄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던 엄마에게 ‘나는
오히려 그런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 라고 아픈 아이는 전한다. 엄마는 이 당혹스러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엄마가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아이 역시 자신의 행복을
갈구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아픈 자식을 붙들고 전전긍긍하며 애쓰는 엄마를 매일같이 봐야 하는
아이로서는 오히려 자신이 엄마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불행했을 것이다. 엄마가 자신을
놓아야만,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미래와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 그게 설사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조금 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행복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지적 장애아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한 이 엄마에게
전문 의료진과 하버드 교수들은 비판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마 장애가 있는 아이와
그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 어려운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애아를 둔 부부일수록
이혼할 확률이 높고, 아이가 자라면서 각종 질환에 걸릴 확률도 높으며, 재활/치료 시설에 들어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쉬운 현실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애가 있는 아이는 낳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 무조건 옳은 일일까? 장애아는 행복할 수 없다고, 장애아를
둔 가정은 행복할 수 없다고 단정짓게 되는 건 그 사회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장애아를 키우기에 괜찮은 제도적 여건과 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아픈 아이들도 행복하게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이야기는 결국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개인적인 일과 사회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는 구실로 자식의 독립성을 잊지 말아야 하며, 사회는 부모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장애아를 부정하는 제도를 유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다. 아이 삶의 주인은 아이라는, 잊기 쉬운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명제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