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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거지?

 

우다다다다다 온 집안을 휘젓고 달리다 내 품으로 (퍽!) 달려와 안기는 네 살짜리 여자아이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 사랑스러움은 대체 누구 유전자인가. ‘다른’ 사랑을 경험해볼 겨를도 없이 대학에서 처음 만난 상대와 결혼을 해 버린 엄마 아빠는 ‘밀당’의 고수 앞에서 늘 패자다.

 

이런 여우가 없다.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눈웃음을 치며 사랑해요 하트를 날리다가도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외국 여자아이처럼 오른쪽 두번째 손가락을 흔들며 "노노노노노!", 팔짱을 끼고 돌아선다.

특히 어른들 여럿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마치 잊고 있던 중요한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일부러 다른 사람들 보란 듯, 내 어깨에 기대어 귓속말을 할 땐 미치겠다 정말. 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작 그 내용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작고 촉촉한 입술이 내 귓불을 간질이는 행위 자체에 푹 빠져 버리는데, 참지 못한 내가 보드라운 몸뚱이를 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으려는 찰나, 요망한 여우가 단호하게 외친다. “그만해!”

 

아빠 등 뒤로 옮겨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남겨진 내가 약간 슬픈 얼굴로 연기를 하면 여우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시 달려온다.

그리고 “왜 그래, 괜찮아? 울지 마, 걱정하지 마.” 하고 달래준 뒤, 내 턱을 한 손으로 잡고 살짝 쳐올린 다음 눈을 감고 내 코에 제 코를 갖다 대고서 이쪽저쪽 천천히 움직인다.

이쯤되면 황홀경에 빠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착각에 빠져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다 바치겠어요, 충성을 맹세하고 만다.

 

둘째가 태어난 지난 10개월 중 대략 반년 정도는 나와 아이에게 최대의 위기였다.

 

지금처럼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게 ‘동생을 재운 다음 나가서 신나게 뛰어놀자’는 의미인 줄 몰랐던 아이는 말로만 “알았어!” 하고, 동생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다 못해 매트리스 위에서 방방 뛰어 기겁하게 했다.


그럴 시기라서 그랬는지, 엄마 품을 독차지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는지.

잠도 무조건 엄마 옆에서, 밥도 무조건 엄마가 먹여주라고 떼를 부렸다. 옷장, 책상 할 것 없이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몽땅 끄집어 내 좌판을 벌려서 가뜩이나 정리 벽이 있는 엄마 속을 박박 긁었다.


몸무게 많이 나가는 것 말고는 기는 것, 걷는 것, 다 꼴등이었던 아이에게도 자랑거리가 생겼으니. 바로 말이 빠르다는 거였다.
어른이 외국어를 배울 때 하는 것처럼 엄마 입에서 나온 단어나 문장을 혼자 반복하며 따라 하던 아이의 언어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확장돼 갔다. 그러나 육아가 어디 반짝반짝 빛나는 양지만 있던가. 불행히도 “싫어! 안 해! 하지 마! 그만해!” 하는 ‘미운’ 네 살 시리즈도 그만큼 빨리 찾아왔다.

 

싫어 같은 부류의 단어를 쓰는 아이는 자아가 형성되는 중이므로...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던가, 들었던가, 한 적이 있는 나는 최대한 자상하게 대답하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이제부터야 말로 진짜 육아가 시작된 거라고 자위를 하면서.
하지만 몸의 피곤함에 극에 달하는 오후 무렵, 한 놈쯤 낮잠을 자 줘야 그나마 나도 뭐라도 좀 챙겨 먹고 한숨을 쉴 수 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날엔 날카로운 짐승처럼 변해버렸다. 그러다 보면 “동생 코 자야 하니까 조용히 하자고 했지!”, “엄마 말 안 듣고 네 마음대로 하려면 다른 방에 가 있어!” 하는, 첫째 아이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말들이 속수무책으로 튀어나왔다.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내일은 엄마가 더 잘 하도록 노력할게."

죄책감에 사로잡힌 엄마에게 아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제 탓이요 해야지~" 훈수를 둔다.

'제 탓이요'는 가톨릭에서 미사 도중 다같이 외우는 기도문인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며 가슴을 쿵쿵쿵 치는 걸 하라는 거다. 이 여우!

 

그러던 언젠가. 두 돌 무렵이었다. 둘째를 먼저 재우고 기어이 엄마와 같이 자겠다는 아이 옆에 누웠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 준영이 잘도 잔다
따식이도 짖지 말고 꼬꼬 닭도 울지 마라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 준영이 잘도 잔다

 

“자장자장 한 번만 더 하고 자는 거야!”

얼른 너를 재우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엄마의 음흉한 계획을 알리 없는 아이가 흔쾌히 “네!” 한다.

느릿느릿, 그 어느 때보다 정성껏 자장가를 불렀다. 따식이도 짖지 말고 꼬꼬 닭도 울지 말라는 부분에선 감히 혼을 실어 불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1절이 끝난 뒤 숨죽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한참 지나도 “한 번 더! 계속해줘~”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말 여기서 끝이야? 가자미같이 눈알만 옆으로 굴려 아이의 동태를 살피는데, 옆으로 돌아누웠던 아이가 내 쪽을 바라보며 한 마디 날렸다.

 

“엄마, 알라뷰~~”

 

알라뷰? 기계적으로, 귀찮기까지 한 심정으로 오로지 너를 잠의 세계로 인도하려던 내 가슴에 콕 박힌 사랑의 비수. 평소 자주 사랑해~ 고마워~ 같은 표현을 하는데도 왜 그 단어에, 억양에 그토록 가슴이 쿵쾅거렸는지 모르겠다.

화들짝 놀란 기색을 감추고 “그래 나도 알라뷰 준영아~” 하고는, 다시 자려고 옆으로 누운 아이를 꼭 껴안고서 같은 자장가를 수십 번 불렀다. 흑 또 당했다!

 

31개월. 아이가 부쩍 컸다고 느낄 때는 아침에 먼저 일어난 내가 자는 아이를 볼 때다.

산골 마을에도 봄이 온 덕분에 요즘은 가볍게 내복에 조끼만 입고 자는데, 두껍기만 하던 허벅지에 소녀의 둥근 곡선이 그려질 때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행복하면서도 아쉽고 서운하다.

 

낮에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보통 아이를 재우고 난 다음이나 새벽에 일을 하는데, 어쩌다 자다 깨서 옆에 엄마가 없다는 걸 안 아이는 다다다다다, 서재로 달려오면서 “엄마아아~~ 엄마아아~~” 대성통곡을 한다.

 

그래 내가 네 엄마지, 네가 내 새끼지.
마치 내 존재의 이유가 분명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 속에 이 아이를 넣고 다니던 때를 떠올린다. 매 순간 너에게 말을 걸고, 너와 함께했던 온전한 날들. 그 시절에 비하면 각자의 몸뚱이로 떨어져 나간 지금은 너나 나나 너무 외롭다.

엄마 노릇이란 게 죽어야만 끝난다지만, 이렇게 평생 나를 그리워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꽤 괜찮은 결말이 아닐까. 나는 서럽게 우는 아이를 안으며 깊은 위로를 받는다.

 

“기저귀 갈아주세요 엄마~”
살포시 눈을 뜬 아이가 기지개를 켜며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인다. 유치원 보육교사인 여동생은 준영이 정도의 표현력을 가진 아이가 아직도 기저귀를 안 떼고 있는 건 순전히 ‘양육자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데, 나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밀당의 고수에게 기저귀 갈아주는 이로 '간택'되는 건 영광 중의 영광이다.

눕히거나 세워 아랫도리를 벗기고 차가운 물티슈나 물로 성기를 씻은 다음 새로운 기저귀를 채우기까지. 그저 누군가에게 제 몸을 내맡기는 처지인 아이로서는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끔 요 여우 아가씨는 방금 전에 아빠랑 기저귀를 교체했는데도 엄마에게 다시 "기저귀 갈아쪄야~" 하는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그러니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건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나를 더 꼭 안아주세요 하는 말이나 같은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나는 아이의 기저귀 가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기저귀 갈이를 핑계로 아이의 매끄러운 엉덩이를 더듬는 일도, 아이의 방귀와 응가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며 웃는 것도, 말리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후후 부는 일도 좋다. 어쩌다 찬물로 아이 엉덩이를 씻겨야 할 때 “앗, 차가워” 하며 황급히 도망가는 아이의 앙증맞은 뒷모습도 오래오래 보고 싶다.

 

또 다른 속내라면 기저귀를 언제 뗐네 하는 일 따위에 나와 아이를 가두고 싶지 않다는 것.
지금껏 혼자 뒤집고, 걷고, 뛰었던 것처럼, 겨우 엄마 아빠 하던 아이가 호주로 데려달라는 엄마를 제 등에 태우고는 아빠를 보며 “엄마랑 호주 갈 건데, 아빠도 같이 갈래요?”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알아서 벗어버릴 것이다.

 

앞으로 넌 어떤 소녀로, 여자로 성장할까?

 

어려서나 지금이나 나는 전혀 손이 안 가는 분홍색에 열광하고,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엘사와 안나 '공주'들에 흥분하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할머니에게 얻어온 찍찍이 고데기를 제 앞머리에 얹어 놓는 걸 보면 분명 엄마보단 미적 감각이 나은 것 같다.

저 매끈한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짧은 치마를 입을 때도 오겠지. 내 립스틱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화장하는 데도 기꺼이 공을 들이는 여자일까? 첫 생리는, 첫 연애는, 첫 배낭여행은? 커서도 공룡, 공구, 자동차, 삽에 열광할까? 네가 결혼식을 하는 날, 집으로 돌아온 엄마 아빤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딸 바보 엄마의 상상은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이 난다.

 

지금까지 추세로 보건데 앞으로도 이 관계에서 나는 늘 패자이리라.
그게 뭐 대수인가. 그저 이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러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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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숙
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이메일 : elisabethahn@naver.com      
블로그 : http://blog.naver.com/elisabet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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