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옆에서 자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간밤에 분명 남편 옆에서 잠들었는데, 오늘도 나는 우리 침대 밑에 놓인 아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간밤엔 몇 시에 소환되어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잘 자다가도 새벽녘에 살풋 잠이 깨면 꼭 엄마를 불러 끌어내리는 통에, 잠결에 기어내려가 아이 옆에서 자게 된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밤새 뒤척이는 아이 곁에서 새우잠을 잔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며 예민해진 나는 아이가 조금만 뒤척여도 잠을 쉽게 깬다. 아이의 KT쪽 발은 체온이 조금만 오르면 땀이 많이 나면서 가렵고, 또 반대로 조금이라도 오래 차갑게 두면 쉽게 통증이 오기 때문에 특히 겨울엔 잠자리가 신경 쓰인다. 우리 집 실내온도는 늘 약간 서늘한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공기가 서늘해서 잠을 깨는 일도 다반사. 그럴 때 보면 아이는 꼭 이불을 다 걷어내고 자고 있다. 다리를 만져보아 너무 서늘하다 싶으면 이불을 덮어 주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아이가 낑낑댄다 싶어 다시 깨보면 오른발에 어느새 땀이 나고 있다. 밤새 이런저런 이유로 자다 깨다 하다보면 어느새 아침녘이 다가오고, 여섯 시 반부터 일어나겠다고 찡찡거리는 아이를 억지로 눕혀 내내 토닥이다 보면 알람이 울린다.


일곱 시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옆으로 돌아눕는다. 아이는 곧 남편이 있는 우리 침대로 올라가 아빠를 올라타고 목청껏 "아빠, 꼬꼬!(Go Go!)"를 외치고, 남편은 부스스 일어나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간다. 남편은 아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가 아침으로 먹을 우유와 토스트를 준비해 대령한 뒤, 우리가 먹을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시리얼과 베이글, 과일 한 두가지. 가끔 베이컨이나 계란후라이를 곁들이는 간단식이지만, 육아가 시작된 후로 아침 식사 준비는 99퍼센트 남편이 한다. 밤새 아이 곁에서 보초를 서는 나와 달리 남편은 한 번 잠들면 집에 누가 쳐들어와도 모를 사람. 그런 남편이 때로는 야속하지만 그 덕분에 그의 아침 기동력이 나보다 나으니 다행이다. 가끔 먼저 거실로 나간 아이와 남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며 짧게는 15분, 길게는 30분 이상 방 안에서 헤매다 겨우 겨우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간다. 오늘은 3월 1일. 그런데 밖은 간밤에 내린 10센티가 넘는 눈으로 또다시 '겨울왕국'이 되어 있다. 


나는 원래 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이 참 중요한 사람이다. 남편이 가끔 놀리듯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남편이 나 먹으라고 요리해 주고 초콜렛 한쪽, 병 커피 하나라도 챙겨다 줄 때가 제일 좋다. 그런데 임신과 육아를 겪으며 그 두 가지를 제대로 못 챙기는 날이 늘자 안 그래도 까칠한 사람이 점점 더 까칠해졌다. 변변한 한국 식재료를 찾기 어려운 미국 시골에서 4년 째 똑같은 밑반찬만으로 밥을 먹는 것도 지겹고, 외식을 하기엔 박사과정생의 월급은 너무 짜고 한국 식당은 쓸데없이 비싸다. 뭘 먹든 다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하는 처지이니 자장면도 단팥빵도 다 만들어 먹었지만 요즘은 그런 걸 할 여력도 없다. 이곳의 겨울은 또 어찌나 길고 험한지, 3월 1일에도 눈이 펑펑 쏟아져 빙판길이 되는 곳에서 장을 보러 나가는 일도 쉽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 남편이 친구 남편과 차를 타고 나가 장을 봐 오는 날만 목 빼고 기다리는 신세다.


만 두 돌이 넘어도 여전한 잠투정, 우리 부부의 식사 시간과 맞지 않는 아이의 식사 시간은 이번 겨울에도 나의 잠과 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식사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옆에서 끊임없이 채근하는 아이 때문에 밥을 후루룩 마시듯 먹게 되는 일이 다시 잦아졌다. 그나마 남편이 같이 있을 때는 교대라도 해 가며 먹을 수 있지만, 남편이 저녁 수업 때문에 늦게 오는 날엔 가스렌지 앞에 서서 대충 빨리 우물거려야 하는 때도 있다. 웬일로 밥 먹을 때 내 곁에 안 오고 좀 조용하다 싶으면 요 '테러블 투'는 어김없이 사고를 치고 있다. 로션을 마구 짜 내서 온 머리카락에 발라 머리 감는 시늉을 하고 있다거나, 아빠 책에 보드마커로 낙서를 한다거나 등등. 18개월을 지나면서 분명 나아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뭔가 다시 되돌아간 느낌이다.


이 힘든 '얼어붙은'(Frozen) 시간, 이 겨울왕국에서 내게 힘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커피와 맥주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내가 마실 커피 한 사발을 내려두고 가는 남편 덕분에 매일 아침 카페인 보충을 든든히 한다. 나는 2월부터 이곳에서 다국적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 한국어 수업 자원활동을 시작한 터라 요즘은 그 수업 준비로 바쁜데, 아이를 재워놓고 나와 일을 하려고 보면 기력이 다 떨어져서 다시 카페인을 찾게 된다. 가끔 카라멜 마끼아또니 아몬드 밀크 라떼니 하는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도 있지만,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 쌓인 거리를 헤치고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엊그제 집 앞 도로에서 승용차 한 대가 빙그르르 돌며 미끄러지는 걸 목격하고 나니 더더욱 그렇다. 밤에는 카페인 대신 알콜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늦은 밤 맥주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미드라도 한편 보고 싶지만, 11시면 어김없이 나를 부르는 아이의 첫 잠투정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 빠른 속도로 맥주 반 캔을 들이켜며 음주 수업준비를 마치고 나면 남은 맥주는 더 입에 대지도 못하고 버려지고 만다.


후루룩 들이마시는 식습관에 익숙해져 버린, 낮잠 재워 놓고서는 커피 한 잔을, 밤잠 재워 놓고서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초콜렛을 우물거리며 사는 요즘의 내게 남은 건 줄어들지 않는 배와 허리. 가뜩이나 몇 없는 옷이 점점 더 안 맞게 되는 걸 볼 때마다 한숨이 푹 나온다. 애용하던 중고 옷가게가 이전해 버린 뒤라 이제 옷을 사러 가는 일도 쉽지 않게 되었는데, 이놈의 겨울은 왜 이다지도 긴 지! 한국엔 봄 기운이 솔솔 도는 모양인데, 여긴 여전히 겨울왕국이요 설국이다. 베이비트리에도 아이들 입학식 소식으로 분주하고도 따뜻한 기운이 넘실대는데, 겨우 만 두 살 된 꼬꼬마 키우는 겨울왕국 엄마에겐 우울한 기운마저 감돈다. 


요며칠 이러저러한 이유로 심히 우울해져 있던 찰나, 안 되겠다 싶어 찬장을 뒤져 나의 비장의 무기 비타민 D를 꺼냈다. 겨울 초입에 잠깐 열심히 먹다가 중단했는데, 햇빛을 못 보니 더 우울해지는 듯 해서 다시 먹기로 했다. 안 먹다 먹어서인지 약효가 제법 빨리, 강하게 돈다. 부디 이 비타민 한 통을 다 먹기 전에 봄이 오면 좋겠다. 옷도 좀 가볍게 입고, 신발도 가볍게 신고,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아이와 산책할 수 있는, 공 던지고 그네 타며 놀이터 이곳저곳 신나게 누빌 수 있는 봄날이 오기를. 허리에 맞지 않는, 처녀적 입던 청바지는 그만 미련 없이 뜯어 아이 바지로 만들고 중고 옷가게에 새(헌) 청바지 사러 갈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3월에 들어섰는데도 여전히 한낮 최고기온 영하 10도 안팎을 기록하고 있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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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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