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월의 늦은 아침, 여자는 시내 중심가에 진출을 했다.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었다. 후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젊은 사람들 틈에 섞여 번화가를 걷자니 자신조차 젊어지는 듯도 하고 이 거리에 비치는 햇빛은 더 찬란한 듯도 여겨졌다. 중력을 거스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십 여 분을 걸어 외국 SPA 브랜드의 넓은 매장에 들어섰는데. 입지도 못할 화려한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 ‘이런 건 어떤 사람이 입는게요?’ 싶게 등이 트인 참으로 실험적인 디자인의 카디건까지. 참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유쾌하였다.

 잠시 후 지면에서 몇 센티 정도 여자의 몸이 떠오른 것을 어찌 알았는가, 나무꾼이 승천하는 선녀 붙잡듯, 남자에게 전화가 온다. 잔뜩 풀이 죽은 남자는 지난 밤 회식 후 있었던 사건을 소상히 아뢰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데.

내가 술은 왜 마셔갖고, 내가 술은 왜 마셔갖고, 내가 술은 왜 마셔갖고.”

 똑같은 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점점 잦아드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던 여자는 일단 괜찮다.” 위로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허나 온 몸에 중력이 확 느껴지는 것이 지상으로 떠오르던 기분은 지면으로 수직낙하.

 

 “선배, 옷 안 사요?”

 “안 사, 안 사.”

 이미 흥이 깨져서 쇼핑이고 뭐고, !

 

 남편은 회식 후 비틀대며 밤길을 걷다 미끄러졌다. 그래, 그만 엄지손가락이 찢어지고 말아 병원으로 갔더니 심하진 않지만 수술을 하라 했다. 그리하자 응당 나올 수술비가 청구됐다. 그런 침울한 이야기를 마누라 백 년만의 쇼핑 타임에 전해야만 했는가!

 뭐, 수술비는 보험으로 어떻게 되겠지 했는데, 남편의 종신보험에선 그런 종류의 보장은 되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실비보험을 하나 가입하는 게 좋겠지 싶어 메리츠와 LIG에 연락, 상품 설명을 들었다.

 몇 차례 보험 상품에 대해 듣긴 했지만 들을 때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소. 그리하여 대충, 두리둥실 , 그럼 그걸로.’하고 계약을 하고 만다. 이왕 하는 김에 나도 암 보험 하나 넣는 게 좋을까, 싶어 추가로 내 것까지.

 그리하여 이 집안의 보험은 남편의 종신보험, 실비보험, 마누라의 다보장 의료보험, 실비보험, 암보험, 태아시절 가입한 아들의 보험, 거기에 더해 집에 일어나는 사고를 대비한 정확한 이름도 모르겠는 보험까지.

 

 사실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보험이라곤 어머니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하며 들어주신 AIA 다보장 의료보험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 돈 아까운데, 보험 같은 걸 꼭 들어야 하나?’ 구시렁대는 통에 어머니가 보험료 매달 납부.

 ‘넌 겁 없던 녀석이었어, 매우 위험했던 모습!’ 이런 노래를 인생의 메인 테마곡으로 삼으려 했던 내가 점, , 점 작아져간 것은 그래, 뱃속의 아이가 점점점 커져가면서였지.

 나이를 먹으면 진보적이던 젊은이도 보수적인 늙은이가 되어간다던가, 나이 탓인가, 아이 탓인가, 뱃속에 아이가 자라며 나는 자꾸 안정적인 무언가를 부여잡고 싶어졌다. 이 험난한 세상, 예측불허의 날들, 무엇으로 불안을 잠재울 것인가.

 그리하여 보험사의 마케팅에 두 귀를 활짝 열어두니. 그들은 임신 중에라도 일찍 가입하면 일찍 가입할수록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길고 긴 보장 내용을 읊었다. 듣다 보면 이것은 마케팅인가, 협박인가.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질병과 사건, 사고가 있단 말인가. 마음이 약해서, 의지가 약해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야 마니.

 

 출산을 몇 주 앞둔 산모는 55,930원 짜리 태아보험에 가입하고서야 좀 안심을 한다. 그것이 37개월이니 현재까지 269410원을 납부한 모양이다.

 주위에는 금액이 높은 만기환급형보다 저렴한 순수보장형이 낫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험이란 모름지기 죄다 사기이니 그 따위 가입하지 않겠다며 용감무쌍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고, 보험 덕에 입원, 치료 걱정 없다는 이도 있으니 보험은 선인가, 악인가, 필요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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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920일 토요일이었다. 9시가 가까운 시간, 열이 39도를 넘어 오르고 있다. 저녁 무렵부터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긴 했다만 가벼운 감기라 여겼더니 약을 먹여도 토하기만 한다. 옷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닦여보지만 해열제를 삼켜주지 않으니 영 마음이 안 놓여 서둘러 심야 아동 병원을 찾았다.

 수족구병이니 일단 입원을 하고 상태를 지켜보잔다. 그리하여 아이는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고 23일 처음으로 입원 생활을 했다. 입안도 헐었는지 뭘 먹지도 못하고 밤잠도 못 자고. 그리하여 비위를 맞추고자 밤 내내 병원 유모차에 태우고 순례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갔다 오르기도 여러 차례.

 병원에는 아이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폐렴 혹 가벼운 모세기관지염 증상이었다. 아이의 엄마나 할머니에 따르면, 굳이 입원하지 않아도 되지만 집과 병원을 오가는 통원치료보다 안심이 되기도 하는데다 일단 입원을 하면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으니 그 편이 훨씬 낫다고들 했다.

 아무튼 짧은 입원 생활도 몹시 지쳐 퇴원해도 좋다는 월요일 아침에는 먼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되었으니.

 운 좋게 혼자서 다인실을 사용해 병실요금은 따로 없고 치료비가 55,530원에 보험료 청구 시 필요한 진단서가 10,000. 합이 65,530. 보험사에 필요한 서류를 보냈더니 2주 후 14만원이 통장으로 입금됐다.

  

 첫 보험료를 수령하긴 하였소만,

 20년 납, 30년 만기.

 이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20년이 되고 30년이 돼, 보험 만기가 되는 날, 아이는 서른 살이 된다. 1365, 새털 같이 많은 하루하루들이 부디 무탈하게 순풍에 돛을 단 듯 흘러 보험 따위, 참으로 가입하지 않는 게 좋았질 않소!라며 보험무용론을 소리높여 외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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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나이 마흔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남들 한 마디 할 동안 열 마디 한다며 타박 받을만큼 급하고 남 이야기 들을 줄 모르는 성격이었거늘, 걷고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늦된 아이를 만나고 변해갑니다. 이제야 겨우 기다리고, 세상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에게 처음 다가온 특별함,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의 이야기가 따뜻함으로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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