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달린 건 뭐든지 좋아하는 녀석을 위해 추석연휴 첫날인 20일 KTX 광명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나들이를 체험시키는 동시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수도권 대중교통 체계에 영유아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돼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테마여행이었다.



7호선 광명사거리역에서 국철 광명역까지 한 번 환승하고 다섯 개 역을 거치는 32분짜리 짧은 구간. 성인 둘이 아이 하나 데리고 가는 일견 ‘간단한’ 여정이었지만 말처럼 쉬운 길은 아니었다. 노약자·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돼있었지만, 지상에서 지하 플랫폼, 지하에서 지상 환승구간까지 온전히 연결돼있지는 않아 유모차를 접었다 폈다 아이를 안았다 앉혔다를 반복해야 했다.



7b23f01ca0cc08d5fc0333d6091f24d1.그렇게 도착한 광명역. 날렵한 KTX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펙터클한 풍광을 녀석에게 선사했건만 반응이 어째 뚱하다. 여독이 쌓여 졸음이 오나... 역사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유모차에 몸을 쑤셔 넣고 만사가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기념품점에 이르자 녀석은 갑자기 유모차를 박차고 일어났고 KTX 모형 장난감 앞에서는 흐리멍덩했던 두 눈에 총기가 흘렀다. 조그만 상점에 아내와 녀석만 들여보내며 난 언제나 그랬듯 이렇게 말했다. “구경만 해~.”



녀석은 기차 모형을 꼭 쥐고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갖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지만 녀석은 내게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하고 있었다. 아빠에게는 자신의 요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체득한 것 같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창문 너머 보이는 녀석의 눈빛은 너무 슬펐다.



5f6f725ab1af0906de9e34b1f78e2c61.구경을 끝내고 나오자 녀석은 다시 유모차에 털썩 주저앉았다. 축 늘어진 어깨. 아내가 농담 삼아 말했다.

“성윤이가 속으로 그랬을 거야. ‘사주지도 않을 거면 데리고 오질 말든가. 아빠 엄마! 장난하냐?’”

아내가 입을 열기 전에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사자. 다시 발길을 돌려 상점으로 갔다. 30% 할인에 19,600원. 과감히 질렀다. (그 순간 이 글의 주제도 바뀌었다) 녀석은 선물상자를 유모차 손잡이에 올려놓고 양팔을 벌려 꼭 안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얼마 만에 사준 장난감이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머리를 쥐어짜봐도... 없다. 그렇다. 생후 27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준 장난감이었다.



ca9ee010b79ed428d5a0ac5980fa0bcd.집에서 굴러다니는 수많은 바퀴 달린 장난감은 녀석의 사촌 형·누나들의 것을 물려받거나 ‘소울메이트’인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것들이었다. 물산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난 녀석에게 절제를 가르치고 싶었고 그 교육목표가 빚은 극단적인 결과였다. 그래도 울며불며 떼쓰지 않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집에 돌아와 레일을 조립하고 건전지를 넣고 기차놀이를 했다. 한참을 놀더니 녀석이 다시 레일을 분해해 박스에 담고는 제 키만한 선물상자를 손잡이를 이용해 한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다른 쪽 손가락으로 뭔가를 쓱쓱 그리고는 바지춤에 주섬주섬 구겨 넣는 시늉을 한다. 녀석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해보니 카드 긁는 모습이었다. 엄마 아빠가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생애 첫 선물을 선사한 기념비적인 일이었지만, 카드를 아내가 긁은 점은 아쉽다. 항상 “구경만 하라”는 아빠의 고정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내가 녀석에게 말했다. “기차 누가 사줬어? 아빠가 사주셨어. 아빠한테 ‘고맙습니다’ 해.” 녀석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엎드려 절받기’이지만 기분은 좋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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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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