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방학.jpg

 

아들은 오늘 모처럼 학교에 갔다.
2학기 준비를 위한 모임이다.
방학 내내 반 나절은 잠으로 보내는 녀석이 오늘은 내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 나를 놀래켰다.
새벽 서너시 까지 책을 읽거나 만화를 보느라 늦게 자는데 어제는 남편이 작심하고

옆에 끼고 일찍 재웠던게 효과가 있었다.
전철역에서 내리는 녀석은 " 오늘 저녁까지 먹고 늦게 올지도 몰라요" 하며 싱긋 웃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랜만에 학교 선배들 만나 어울릴 기대에 발걸음마저 가벼운 모양이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들이라니..
학교 사람들을 좋아하는 아들이라니...
심지어 개학을 기다리는 아들이라니...

아들의 여름 방학은 단순하게 흘러갔다.
보통 오후 1시 넘어까지 자고 일어나 밥을 조금 먹고 지난 밤 11시쯤에 부모님 방에 맡겨둔

핸드폰을 찾아 게임 중계 동영상을 본다. 웹툰도 보고 포털 뉴스도 보며 뒹굴 거린다.
그날치 신문을 넘겨보고, 씨네 21을 챙겨 읽고, 중간 중간 내가 시키는 심부름을 느릿느릿 하고,
다시 침대에 옆으로 누워 선풍기를 바짝 틀어놓고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일주일에 3일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컴퓨터 앞에 두 시간씩 매달려 있다.

방학한 직후에 가족이 다 모여 방학계획을 정할때 핸드폰은 하루에 3시간만 사용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실제로는 하루 반나절은 손에서 놓지 않고 지낸 모양이다. 엄격하게 할 수 도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척 해줬다.


개학하면 어짜피 맘대로 쓸 수 없는 핸드폰이다. 방학기간이라해도 하루 반 나절은 자느라 못 들여다보고 밤에는 적어도 11시엔 부모방에 맡겨야 하는데다 밥 먹는 시간 등은 쓰지 않으니까 그 나이의 청소년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다.

              

핸드폰도 없고 늦게 일어나 잠도 금방 안 오는 긴 밤엔 주로 책을 읽는 눈치다.
예전에 봤던 만화책을 죄다 다시 읽기도 한다.
나는 매일 도서관을 드나들며 아들이 재미있어 할 만한 책을 열심히 빌려와 아들 방에 넣어 준다.
꼭 읽었으면 하는 책엔 용돈을 걸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놓인 책은 거의 다 읽어치운다는 것을 안다.

TV 평론가 이승환의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여러권
최승범의 '나는 남자고 페미니스트 입니다'
허혁의 '나는 그냥 버스기사 입니다'
김양지영, 김홍미리의 '처음부터 그런건 없습니다'
랜들 먼로의 '위험한 과학책'
박서련의 '채공녀 강주룡'
양경수의 '잡다한컷'
킴벌리 아프캉. 메건 바츠케의 '단위, 세상을 보는 13가지 방법'
만화로 보는 여성 투쟁의 역사 '시스터즈'

방학중에 아들과 함께 읽은 책들이다. 이 외에 제 용돈으로 사들인 마블 만화책 시리즈와

일본 만와책들, 조경구와 조석의 만화책들은 매일 옆에 두고 살았다.
유일한 방학 중 과제는 영화 '남한산성'을 감상한 후 분석한 글을 써 내는 것이었는데

내내 심각하게 보더니 "그놈의 명분이 다 뭐라고... 하여간에 사대부들이 문제야 문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뭔가 심오한 평을 적어낸 모양이다.

한 두세 번쯤은 나랑 크게 싸웠고, 여동생들과는 더 자주 싸웠고, 자주 수다를 떨며 웃었고,

가끔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며 킥킥 거렸고, 자러 가기 전에 나를 꼭 안아주었고,

영화 '신과 함께 2'를 같이 보았고, 사촌형과 둘이 놀이농산에 가서 평소에는 질색하던 무서운 놀이기구들을 꾸역 꾸역 타고왔고, 할머니 제사를 드리러 구미를 다녀왔고, 자연드림 비빔면을 하루에 한번 씩은 반드시 먹어가며 아들은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개학이 빨리 왔으면 좋겠단다. 아들의 개학은 9월 3일이다.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 않고 자전거로 동네를 누비거나 공을 차고 농구를 하고 매일 친구들을 만나며 기운차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우리 아들이 아니다. 


늘어지게 자고, 핸드폰을 보고, 선풍기 앞에서 뒹굴거리고, 밤 새 책을 읽으며 집 밖에는 여간해서

스스로 안 나가는 모습이 우리 아들이다. 다 바랄 수 는 없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열여섯 아들의 삶엔 아직 입시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 없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매일 매일 단단하게 제 생각을 키워가며 자라고 있다는 것만 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느닷없이 가을이 왔다.
그렇게 뜨겁고 가물었는데도 밤나무엔 초록색 밤송이들이 조랑조랑 달렸다.
감나무 잎들도 생기를 잃지 않았다.
매미는 포기하지 않고 울고 또 운다.
아들도, 밤나무도 감나무도, 매미도
더운 날들 잘 견뎌낸 모든 것들이 참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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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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