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충북 단양으로 들살이를 다녀온 다엘의 얼굴과 팔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대안학교의 들살이는 학교 밖으로 여행을 떠나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3박 4일의 여행 동안 다엘은
요리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도 들었단다.
“다엘은 망친 요리도 살려내는구나!”

 

다엘의손1.jpg » 잠든 다엘의 검게 그을린 팔을 만져보다


 
여행 다녀온 날 피곤할 법도 한데
다엘은 입양모임 행사에 따라왔다가
이모 집 청소 아르바이트까지 끝냈다.
늦은 시간에 동네 주민으로부터
아파트 소식지 돌리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진작 알았으면 참여했을 거라며 땅을 쳤다.

 

다엘이 없는 동안 할머니는 유난히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나는 여유를 즐기다 보니 그다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방에 혼자 있을 때,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미세한 원자(?)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목소리, 웃음, 움직임…
내 주변을 감도는 이게 뭐지?

 

다엘이 없는 시간의 자유를 누리면서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아팠는데
나중에 원인을 알게 됐다.
우연히 설문조사에 응했을 때
‘요즘 나를 우울하게 하는 일은?’
이 질문에 바로 나온 답이
‘아들의 독립’이었다.
조금씩 품을 벗어나는 아이의 손을 놓지 못하고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채 슬퍼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 알고도 직면하지 못한 거겠지.

 

내 품 속에서 무구한 눈동자로 눈맞춤 하던
작은 아기는 어디로 갔는가?
보드라운 이마와 볼, 귀여운 몸집으로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아기를 잃은 상실감을
온 몸과 마음으로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만비키 가족’이라는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영원히 같이 살 순 없어도
함께했던 시간이 각자의 삶 속에 깊이 각인되는 것,
그 자체가 가족 아닐까.”
그의 말 중 삶 속에 깊이 각인된다는 의미를 실감한다.

 

평소 학교에서 돌아온 직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며 놀고 온 다엘의 몸에선
하루 동안의 땀과 먼지, 소리 높여 싸우거나 웃어댄 흔적이 따라온다.
이땐 말 한 마디라도 더 붙이면 바로 짜증이 솟는다.
밤에 잠 들기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지만
알람 소리에 아이는 벌떡 일어나 식탁 앞에 앉는다.
이 때도 온몸으로 발산되는 짜증.
그럴 땐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내가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쓸 때면
턱 하니 무릎 위에 올라앉으며 말한다.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줘!”
이것이 사춘기 호르몬의 반란이라는 건가?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쓴 랜디 포섬 교수는
자신의 사춘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당시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곤 했단다.
그럴 때 부모님은 한 번도 뭐라고 한 적 없이
스스로 잦아들도록 기다려주었다고 했다.
또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방의 벽지에 수학 공식 등의 낙서를 해놓곤 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부모님이 간섭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대목이 마음에 남아
사춘기에 접어든 다엘을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다엘의 성장을 기념하고 나의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며칠 전엔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함께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동선을 짜며
제주 서부를 마음껏 돌아다닌 여행을 통해
나도 다엘도 한 뼘 더 성장했다.

 

예쁘기만 했던 제주 애월의 바다보다
곶자왈(숲과 덩굴의 제주 말)의 녹음이 더 설렜다.
덩굴 숲이 우거진 하늘을 보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생각도 해봤다.

 

여행 후 우연히 만난 책의 한 구절은 내게 묘한 위로를 전해주었다.
‘제 생각에 슬픔은 볼품없는 소파 같습니다.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소파요.
장식을 할 수도 있고, 덮개를 씌울 수도 있고,
방구석에 밀어놓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과 같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책 ‘코끼리는 무덤이 없다’ 중)

 

아이의 성장통을 지켜보며
나의 마음도 세심히 어루만져야 함을 깨닫는다.
항상 다음 풍경이 더 좋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극복하려 하지 말고
그것과 그냥 함께 살아가면 된다는 쉬운 진리를 배웠다.

 

2018제주다엘.jpg » 제주 여행에서의 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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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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