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림.jpg

 

유난히 바쁜 날은 꼭 냉장고도 비어있다. 이건 무슨 법칙이라고 해야하나..ㅠㅠ
두 아이들 픽업해서 부랴부랴 시내에 있는 생협 매장가서 장을 보다보니 시간이 늦어 버렸다.
안 되겠다. 이런 날은 쉽게 가야지.
생협 맞은편에 있는 반찬가게에 들렀다. 마을에 사는 지인이 운영하는 친환경 반찬가게다.
모두가 좋아하는 고들빼기 김치를 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진미채도 사고, 내가 좋아하는

나물반찬도 넣는데 이룸이가 소리쳤다.
"엄마, 장조림 먹고 싶어요. 소고기 장조림이요"
진열대를 흘깃 살펴보니 한웅큼 들어있는 팩이 5천원이다. 우리 식구 한 끼도 안 되겠다.
두 팩은 사야 입맛을 다실텐데 너무 비싸다.
"엄마가 고기 사다가 만들어 줄께. 가는 길에 고기 사서 가자" 우선 달랬다.
삶아 놓은 메추리알도 사고 단골 정육점에 들렀는데 손바닥만한 한우 양지가 만6천원이나 된다.
흐미, 너무 비싸다. 다른 걸 왕창 넣고 같이 조려야겠네.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이룸이는 계속 장조림 타령이다.
"엄마, 그럼 내일 아침에는 장조림 먹을 수 있는거죠? 따듯한 밥에 소고기 장조림을 올리고
그 위에 고들빼기 김치까지 얹어서 입에 넣으면... 아아.. 얼마나 맛있을까요"
이룸이는 이런 면에서는 오빠랑 똑같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욕망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안 해 줄 수 가 없다. 밥도 워낙 잘 먹는다.

저녁치우고 집안 치우고 뉴스 좀 보고 애들 숙제도 봐 주다보니 너무 고단했다.
장조림은 내일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이룸이가 또 한번 쐐기를 박는다.
"엄마, 내일 아침 장조림.. 잊지마세요"
아이고 못살겠다. 해 놓고 자야겠네.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한 것엔 펄펄 뛰는 애들이다.
지들 약속은 수시로 잊어버리고 엄마가 한 약속은 칼같이 챙긴다. 쳇!!

밤 열시 넘어 다시 부엌에 들어갔다.
소고기 장조림은 결혼 16년동안 서너 번 이나 해 봤을까.

기본적으로 식재료가 비싸고 과정이 복잡한
음식은 여간해서 잘 안 한다.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돈도 많이 드는데 반찬을 해 놓으면 양은
얼마 안되고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소고기 장조림 같은 반찬을 자주 할 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오랜만에 만들려면 다시 스마트폰으로 레시피를 찾아가며 더듬더듬 만들어야 한다.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 소고기를 향신채 넣은 물에 삶았다.

그동안 냉장실 야채칸을 뒤져 시들어가는 꽈리고추 몇 개와 새송이 버섯을 찾아 썰었다.
삶아진 고기를 한 김 식혀 손으로 찢는데 쉽게 쪽쪽 안 찢어진다.

연하다고 추천하더니 이 고기 질긴 거 아냐? 겉만 식었구만, 속은 왜 이렇게 뜨거운거야..

투덜거려가며 쬐만한 고기 찢는데 손가락이 다 아팠다.

빨리 조리고 자야지 싶어 냄비를 꺼내고 간장을 붓는데, 아뿔싸... 간장이 별로 없다.
다섯 수저나 간신히 될까..

아아.. 내가 항상 이 모양이지.

장 보러 갈때 집에 무슨 양념이 떨어져 가는지 한 번 살피기라고 해야하는데

기껏 장보고 왔더니 간장이 없다니.. 아.. 오늘은 글렀다. 내일 간장 사다가 만들어야지.
단념을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너무 짜증이 난다.

기껏 복잡한 과정 다 해놓고 이제  간장 붓고 조리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멈추다니...

이룸이는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얼마나 실망을 할까..
그냥 편의점에 달려가 아무 간장이나 사 올까? 아냐, 아냐. 그건 너무 싫다.

시판 양념은 다 싫지만 감미료 듬뿍 들어있는 간장은 특히 더 싫다.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제일 만만하고 편안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열시 반에 전화를 걸어 간장을 빌리러 가겠다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게

들리라고 말 할 수 있는 친구가.... 나는 있다.
그녀는 내 딱한 사연에 큭큭 웃으며 마침 외동딸 작아진 옷도 모아놨으니 오는 김에 가져가라고 한다.
나는 마음 놓고 운전을 해서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로 달려갔다.
간장을 빌리러 가서는 그녀 남편이 최근에 새로 장만했다는 스피커 소리도 들어보고,

차도 한잔 얻어 마시고, 식탁에 앉아 한참 수다도 떨다가 11시 넘어 일어섰다.

멋쟁이인 그녀의 친정 어머님이 내게
물려주시는 옷들과 (환갑이 넘으신 그녀 어머니의 몸매와 취향은 딸인 그녀보다 나와 더 비슷해서
이런 혜택을 받고 있다. ^^) 딸들 입힐 옷이 들어있는 큼직한 가방에 넉넉하게 들어있는 간장병과
얼마전에 한 자루를 샀다는 완두콩까지 한 봉다리 얻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친정에라도 들렸다 오는 기분이다.

집에 왔더니 11시 반..
부랴부랴 간장을 붓고 다른 양념을 넣어가며 고기를 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조려야 해서 그 동안 '이병한'이 지은 '유라시아 견문'책도 여러 페이지 읽었다.
어지간히 조려졌을 무렵에 메추리알과 새송이 버섯, 꽈리고추와 마늘을 넣었다.
슬쩍 슬쩍 간을 보면서 조청도 넣고, 설탕도 넣었다. 국물을 넉넉하게 조렸다.
다 해놓고 보니 큰 반찬통과 작은 반찬통을 채운다. 이만하면 두 세 번은 먹겠다.
다시 부엌을 치우고 씻고 나오니 한시가 다 되어 간다.  누가 보면 김장이라도
혼자 한 줄 알겠다. 으아아.. 피곤하다.

장조림 2.jpg

 
다음날 아침, 이룸이를 깨우며 말했다.
"이룸아, 빨리 일어나. 장조림으로 밥 먹어야지. 엄마가 어제 새벽 한시까지 장조림 만들어 놓고 잤어.
이룸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이룸이는 벌떡 일어나 식탁을 보더니 내게 달려와 안겼다.
"엄마, 정말 고마워요. 감동이예요. 잠도 못자고, 밤 새워 만드시다니.."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그리고는 목욕탕에서 나오는 언니에게 소리쳤다.
"언니야, 이거 먹어봐. 엄마가 밤새워 만드셨대"
아니, 뭐.. 밤...을 새운 건 아니고,그냥 조금 애써서 만든건데...
나는 민망해서 슬쩍 웃었다.

"와아, 엄마 장조림 진짜 맛있어요. 내가 꿈에서 그리던 바로 그 맛이예요. "
"엄마, 국물도 다 먹을거예요. 장조림 국물에 밥 비벼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두 딸들은 밥을 다 먹을때까지 장조림 찬양을 펼쳐 놓았다.
아이고 귀여운 것들, 장조림 반찬 하나에 이렇게 감동하다니... 참 착하다.
화려하고 비싼 반찬이 드믈게 오르는 우리집 밥상에서 소고기 장조림은 아이들이 오랜만에 보는
귀한 반찬이었을 것이다. 한 입 한 입 먹을때마다 감탄과 감사가 쏟아진다.
역시 맛나고 귀한 반찬은 어쩌다, 가끔, 어렵게 먹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고맙고 귀하고 감사하며
먹는 마음이 생긴다.

한창 맛있게 먹는데 갑자기 윤정이가 묻는다.
"엄마, 근데 장조림, 이게 다예요?"
"아니야. 조금 큰 통으로 하나 더 있어"
"휴, 다행이다. 오빠도 맛을 봐야지요. 오빠 먹을게 없는 줄 알구요"
아, 참 이쁘다. 주말에만 집에 오는 오빠 생각을 다 하네. 역시 윤정이다.
금요일 밤에 만든 장조림은 일요일 아침 상에서 끝났다. 남편도 필규도 맛있게 먹었음은 물론이다.

한우는 너무 비싸서 이번에는 돼지고기 안심을 넉넉히 샀다.
메추리알 대신 우리집 암탉들이 낳은 달걀을 삶아서 같이 조리면 푸짐하겠다.
밥 잘 먹고, 건강한 이쁜 아이들에게 번거롭더라도 돼지고기 장조림정도는 자주 해줘야지.
반찬 하나에도 창대한 사연이 담기는 우리집 밥상은 늘 이야기가 넘친다.
재미있게 맛있게 또 다음 끼니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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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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