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그렇게 그림을 그려대던 아이가, 이젠 종이에 그림을 그린 다음 오려서 온갖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뾰족한 삼각형을 그린 다음 오려내서는 테이프로 제 이마에 붙이고 다니며 마녀 웃음 소리를 내고, 또 어느 날은 비행기를 그린 다음 오려내서 입으로 부웅 부웅 휘이이 소리를 내며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사람 모양도 오려내서 비행기에 태우고 말이죠. 그리고 또 어떤 날은 털실 뭉치를 꺼내 실을 길게 잘라서는 벽 한가운데 붙이고, 그 실 끝에 뭔가를 오려 붙인 다음 잡아 당기며 , ~~~”하고 뱃고동 소리를 냅니다. 한 손엔 척, 하니 호일 심지 망원경을 들고요.

 

엄마, 지금부터 여기는 보트야.”

“ (..또 시작이군) 어 그래.”

내가 이걸 잡아 당기면서 , 가자~~’ 하면, 엄마가 네네, 선장님!’ 하는거야, 알았지?”

“ (..또 그거냐) 어 그래.”

, 가자~~”

네네, 선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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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가 탄 보트(소파)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달려갑니다. , 선장님이 저기 창가를 가리키며 이 보인다며 호들갑이시네요. 섬에 도착했으니 이제 내리랍니다. , 절대 발을 물에 담그면 안 된다는군요. 발끝이라도 물에 닿았다간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물 밟지 말랬잖아!!” 그 불호령을 피해, 아니 아니 바닷물을 요리조리 피해 돌과 모래만을 밟고 뭍으로 올라섭니다.

 

휴우~~ 다 왔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저녁밥을 먹고 잠을 잘거야.”

“…”

내가 볶음밥을 만들어줄게.”

(치이이이...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닙니다)

"자, 볶음밥!"

~~ 맛있네~~ 뭘 넣었는데 이렇게 맛있을까~?”

뭐 별거 아니야, 그냥 밥이랑, 소시지랑, 브로콜리를 넣고 기름을 쬐-끔 넣어서 볶는거야.”

 

실은 저 브로콜리 소시지 볶음밥이, 오늘 우리 집 실제 점심 메뉴였다는 것쯤은, 아시겠죠?

아이는 이렇게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한껏 자기만의 놀이를 펼칩니다. 아 물론, 이 재미난 놀이를 혼자 할 수는 없지요. , 엄마와 해야 합니다. 저녁 때 아빠가 오면 아빠랑 해야 하고요. 만 다섯 살 아이가 엄마 아빠를 부하 선원 부리듯 조종하고 명령하고 재촉하고 훈육하는 일이 좀 재미난 일이겠어요? 하루에 몇 번을 해도 좀처럼 싫증나지 않지요.

 

11월에 다리 수술을 받은 뒤 이런저런 후유증으로 어린이집을 쉬어야 했고, 또 최근 2주간은 북미를 한바탕 휩쓸고 있는 한파 때문에 한낮 기온이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져 꼼짝 못하고 집에서만 지내야 했습니다. 워낙 밖에 나가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여서 못내 조바심이 났는데, 웬걸, 아이는 오히려 집에서 잘 노는군요. 이전보다 이 상상 놀이가 한층 더 섬세해지면서 가능해진 일인 것 같습니다. 풍선 하나를 던지고 놀아도 꼭 상황을 설정해서 침대 밑 카펫 바닥을 진흙이라고 지정합니다. 그래서 풍선이 진흙에 떨어지면 반드시 그 옆 수돗가에 가서 풍선에 물을 치이익, 뿌린 다음 옷 앞섶으로 닦아내야 하지요. 그리고 엄마랑 뒹굴뒹굴, 하염없이 침대 위에서 데굴거리며 놀 때에도 꼭 동물인형 친구들을 줄줄이 데려와 함께 합니다. 돌고래 에디, 백호 마르코, 토끼 차차와 파파, 강아지 스누피, 스누이, 삡삡까지. 모두 데려와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방귀쟁이 강아지 삡삡이 방귀 뀌는 소리에 깔깔깔 넘어가는 사이에 시간은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고 맙니다.

 

시간 가는 걸 가장 아까워하는 아이답게, 아이는 늦은 오후가 되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캠핑도 해야 하고, 요리도 해야 하고, 숨바꼭질도 해야 하고, 무대 만들어 춤도 춰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면서요. 아직 시간을 읽지는 못하지만 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동분서주하는 아이 덕에 저도 덩달아 정신이 없습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더니, 드디어 마음을 정했답니다. 일단 캠핑부터 해야겠다는군요. 지인이 선물해 준 기차놀이테이블 세트는 거의 장식품 수준, 그 테이블 세트가 들어 있던 박스를 보트로도 썼다가, 썰매로도 썼다가, 하더니 이제 텐트처럼 세워서 캠핑장으로 씁니다. 추우니까 불도 좀 피우고요. 불 피운 김에 마쉬멜로우와 고구마도 좀 구워 먹지요.

 

그래도 이 캠핑을 하고 있으면 곧 남편이 돌아올테니, 나머지는 그에게 떠넘길 생각입니다. 이왕이면 남편더러 캠핑장에 나타난 괴물 역을 하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괴물을 피해 도망가는 아이가 침실 문을 꽝 닫고 들어가고, 아이를 따라 들어간 괴물 남편이 아이와 몸싸움을 해가며 마저 놀게 될테니까요. 그러고 나면 저 보트, 아니 소파, 에 좀 앉아 쉴 수 있겠지요. 참 이상합니다. 오늘 소개하려던 그림책 <프리텐드>(Pretend)<킹 잭>(King Jack and the Dragon)은 요즘 잘 읽지도 않는데 말이죠. 어쩜 저렇게 두 책과 똑 같은 방식으로 노는 건지, 신기하기도, 재미나기도 하네요. 특히 <프리텐드>란 책은, 앞 부분이 정말 똑같거든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는 아빠에게 느닷없이 다가와 지금부터 이 소파를 보트로, 우리집을 바다인걸로 쳐요!” 하는 아이의 모습은 딱 우리 아이 모습 그대로입니다. 뒷뜰에 박스로 만든 성을 놓고 용이 나타날 거라며 호들갑을 떠는 <킹 잭>은 또 어떻고요. 아마 요맘때가 가장 저 상상놀이에 흠뻑 빠지는 시기인가 봅니다. 상상놀이 뿐이겠어요, 그저 노는 게 제일 좋은, 노는 게 일인 나이죠.

 

요즘 아이는 밤이 되면 한국은 지금 아침이지? 나 한국 갈래.” 하고 말하곤 합니다. 태어나서 아직 한번도 안 가본 그곳, 어딘지도 잘 모르는 그곳에 갑자기 가고 싶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지금 한국 가면 아침이니까 다시 놀 수 있잖아!”      

 

오늘 아침, 수술 후 두 달만에 드디어 어린이집 등원을 시작했습니다. 조용한 집에서 이 글을 쓰며 뒤돌아보니, 보트, 아니 소파가 가만히 원래 상태를 유지하며 앉아 있군요. 오후 네 시, 아이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집 거실은 다시 바다가 되고, 캠핑장이 되고, 화산 지대가 되겠지요. 아이와 살며 또 어떤 상상 속 세상을 만나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아이가 아직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할 때 만큼은 한껏 함께 즐길 생각입니다. 아마 이것도 잠시, 진짜 아이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때가, 우리가 간섭할 수도 없고, 간섭해서도 안될 세계가 곧 올테니까요.  


-- 

읽은 책:

1) Pretend, by Jennifer Plecas (이건 번역본이 없네요..ㅠㅠ)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25553


2) <나는 용감한 잭 임금님> (King Jack and the Dragon)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77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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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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