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unsplash)
사시나무처럼 떨며 위태롭게 건너간 20대의 나날들은, 그러나 내가 맞닥뜨린 다음 통과의례에 비하면 정말이지 뺨을 간질이는 새의 깃털에 불과했다. 다음 통과의례는, 그렇다, 결혼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궁금해했고 스스로도 왜 여태껏 안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그 놀라운 일을 결국 20대의 끝자락에 가서 하고야 말았다. 한 타인을 만나서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언약을 하고 새로운 가족으로 묶인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용감하게 돌진했을까.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두고두고 돌이켜보며 이때의 선택을 곱씹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각각의 코스가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고 실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혼이 몰고 온 폭풍우에 휩싸여 휘청거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타인과 타인이 만나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일구는 것이었지만 2003년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결혼은 내가 선택한 타인의 원가족에게 귀속되는 것이었고, 나의 원가족에게서 다른 원가족에게로 ‘보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은 이런 개념이 실생활에서 엄연히 힘을 지닌 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발견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수많은 충고와 꾸짖음, 원망, 기대가 쏟아졌고, 내가 행하겠다 약속한 적 없는 수많은 의무들이 시시각각 생겨나 내 존재를 내리눌렀다. 놀랍고, 두렵고, 끝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삶을 비관하게 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내가 택한 타인과 그의 가족은 그나마 다른 가족들에 비하면 몹시 양호한 편이라고 주위에서 말했고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았지만, 그런 ‘평균’이나 ‘너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남은 이러저러하다더라’ 하는 얘기는 내 일상과 의미 있는 연관을 맺지 못했다. 내게는 그저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구속감, 한 번도 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기상천외한 의무들, 족히 50년은 과거로 퇴보한 듯한 열패감, 멀쩡한 시민에서 갑자기 노예로 전락한 듯한 참담함, 이 모든 고통이 오직 여자라는 종족에 속한 나에게만 해당하고 남편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는 억울함만이 손에 잡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결혼한 지 서너 달이 지났을 즈음, 시간당 12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가족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다. 패닉 상태에 빠진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붙잡은 비싸디비싼 기회였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쏟아놓고 전문적인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가 해준 이야기대로 실천해서 내 상태를 개선하고 싶었다. 무조건 전문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할 거라고, 거의 결연하기까지 한 다짐을 수십 번씩 한 뒤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를 맡았던 그 상담 전문가는 그때까지 내가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얘기, 너무나 빤하고 실효성이 없어서 이게 과연 ‘전문가’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인지 의심하게 될 만한 얘기만 주야장천 늘어놓았다. 남편이 ①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②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③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니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라는 것.
그때 느낀 절망감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붙잡아보자는 심정으로 그곳에 갔더랬다. 기대를 너무 하면 실망할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를 던져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족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 뒤통수를 치며 거세게 가격해왔다. 그때까지 수없이 들어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듣게 될 그 말이, 가슴에 천 근의 무게로 얹혀왔다. 여자는 얻어맞지만 않으면 그것만도 감지덕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 그 말은 여자는 하등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세세한 감정과 자기평가와 자아를 가진 고등동물이 아니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