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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unsplash)

박완서 선생의 작품과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쯤, 선생의 작품들을 발견하고 게걸스럽게 읽어 내려갔던 것 같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나오고 가독성이 좋은 선생의 소설들은 10대와 20대 내내 내게 변함없고 친근한 벗이 되어주었다. 나는 주로 뭔가를 잊고 싶을 때, 시간을 때우고 싶을 때 박완서의 책을 펼쳐들었는데, 선생의 소설들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완벽히 부합했다. 그 어떤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굵직한 사건인 6·25를 배경으로 하는 엄마의 말뚝 2는 선생의 책들 중 가장 자주 들추어보는 책이었다. 사회 시간에는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못했던 전쟁이, 선생의 소설을 통과하자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가 되어 다가왔다. 전쟁이 인간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는 엄마의 말뚝 2는 소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과도 같은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6·25,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삶에 시퍼렇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바로 어제 내 옆에서 일어난 일인 양 생생하게 실감했다.


선생의 소설이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나 마흔이라는 나이에 접근해갈 때였다. 내 의식 속에서 박완서의 소설은 시간을 때우는 데 좋은 재미용이었다. 출판 관계자나 문학 평론가들의 글에서도 은근히 박완서의 소설을 사소설혹은 여성지 수기정도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나는 그토록 좋아하면서 두고두고 읽었던 그 소설이 얼마나 훌륭한 문학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외국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의 비호를 받는 다른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조한혜정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2라는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붙은 박완서 작품에 대한 소고를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박완서 소설의 진정한 위상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등장인물이 나와 생생하게 자기 삶을 펼쳐 보이는 이야기야말로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게 되는 데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 셈이다. 국가나 민족, 저항 운동에 대한 담론을 펼쳐야만 의미 있는 문학작품이고 개개인의 삶을 펼쳐 보이는 소설은 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풍조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흘러나온 지류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 문학사에서 선생의 작품이 위치해 있는 지점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선생의 작품을 그토록 즐겨 읽고 좋아했던 이유도 되짚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현실성에 있었다.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천사 같거나 엄청난 매력으로 모든 남자를 압도하는 팜므 파탈이거나 똑똑하고 완벽해서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는 커리어 우먼이 아니다.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속물이고, 때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행태를 일삼는다. 작가의 의도에 맞추어 정형화된 여성이 아닌 실제 우리 삶에 있을 법한 선악이 뒤섞인인물인 것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붙잡고 힘들어하던 때, 희로애락의 감정과 속물적 욕망이 뒤섞인 여성 인물이 인생의 고민을 현실감 있게 풀어가는 이야기를 읽는 것은 내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박완서는 여성이 천사나 완벽한 엄마, 엄청나게 똑똑한 커리어 우먼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기운 자국이 보이지 않는 천의무봉의 이야기 솜씨로 펼쳐 보여주었다.


이로써 내가 왜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박완서 소설만큼의 감동을 얻지 못했는지도 설명이 된다. 일부 남성 작가들의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인조인간 같았다. 그저 소설의 짜임새를 위해 만들어낸, 현실에는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여성들이었다. 가짜 같은 인물들 때문에 쉽게 소설에 몰입하지 못했고, 한 번 읽고 난 뒤에 다시 집어들게 되지도 않았다.

박완서의 소설들은 이야기와 직관으로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정당화시켜주는 요술방망이었으며, 생생하게 활자화된 삶으로 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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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
헤드헌터, 번역가, 소설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지만 저의 제1 정체성은 언제나 ‘엄마'였습니다. 엄마 경력 12년에 접어들던 어느날,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너무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연재 글을 바탕으로 에세이 <엄마의 독서>를 펴냈습니다. 2013년 < 모던 하트 >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장편소설 < 잠실동 사람들 >, < 맨얼굴의 사랑 >을 펴냈습니다.
이메일 : emma7503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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