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아빠 왔다!!"
밤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두 딸들이 달려든다.
딸들은 서로 밀쳐가며 아빠한테 안기려고 야단이다. 남편은 둘을 안아주고
입술을 내미는 딸들에게 뽀뽀도 해 준다.
"나두"
딸들 뒤에 서 있던 내가 팔을 벌리고 입술을 쭉 내밀고 다가가니
남편은 건성으로 안아주는 시늉만하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시늉도 제대로 안 해주고 그냥 휙 지나치는 일이 더 많다.
이부자리를 펴면 거실에서 자는 딸들 사이에 누워서도 얼마나 깨가 쏟아지는지 모른다.
서로 저를 재워 달라고, 가운데 누운 아빠를 큰 딸은 등으로 껴안고, 막내딸은
아빠 얼굴을 제 얼굴로 끌어 당기며 안고 잔다.
아이들 먼저 재우고, 집안 정리 끝나고 씻고 나오면 남편도 그 사이에서 잠들어 있기
일쑤다.
슬쩍슬쩍 깨워가며 나랑 자자, 빨리 안방으로 와.. 해 보지만
남편은 귀찮은듯이 내 손길을 밀어댄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 늦게 퇴근하는 남편하고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게
고작 같이 자는 시간 뿐인 마누라는 그 시간을 고대하는데 남편은 딸들 사이에서
달게 잠들고는 다시 일어나기 싫어한다.
흥.. 미워죽겠다.
가끔 남편에게 푸념한다.
"딸들에게 하는 것 만큼만 마누라좀 사랑해봐"
남편은 피식 웃기만 한다.
모든 표현이 대체로 서툴지만 특히나 애정표현 하는 것엔 참으로 서툴었던
남편이었다. 표현에 적극적인 나는 늘 말로, 스킨쉽으로 넘치게 들려주는데
돌아오는 표현이 없으니 가끔 서운하다.
그런데 남편은 딸들에게는 곰살맞고 다정하다.
한마디로 딸들을 너무나 이뻐한다.
이해는 할 수 있다.
열다섯 아들도 이쁘겠지만 물고 빨고 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한참전에 지났고
여전히 안아달라고 하는 아들이지만 아빠보다 큰 아들을 안아주는 것도
어색해서 남편은 슬쩍 몸만 둘러주고 빼게된다.
아빠한테 핸드폰을 빌릴때만 고분고분하다가 제가 원하는대로 안 해주면
버럭 성질을 내며 제 방 문을 꽝 닫아 버리는 아들이다.
마누라는 사랑한다는 말도 잘하고 안아 달라는 말도 잘 하지만, 애정표현보다
더 넘치는 잔소리가 있다. 안아달라고 매달렸다가도 돌아서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잔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딸들은 다르다.
애정만 넘치게 준다. 잔소리도 없다. 아직은 품에 쏙 들어온다.
무엇보다 아빠를 언제나 열렬히 환영해준다.
여전히 아빠가 저를 재워주기를 원한다.
내가 남편이라도 마음이 저절로 흘러갈 것 같다.
그래서 아빠와 딸들은 늘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도모한다.
잠깐 볼 일이 있어 외출하는 남편에게 딸들이 달려나가 귓속말로
뭔가를 소근거리면 남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한다.
돌아올땐 어김없이 양손에 과자가 한 아름이다.
"생협 과자 사다놨는게 마트 과자는 왜 또 사와!"
마누라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소용없다.
남편은 딸들과 셋이 앉아 바사삭 바사삭 맛나게 먹는다.
흥... 그런 과자 먹으면 애들 피부만 안 좋아진다고!!
궁시렁거리다 나도 같이 앉는다.
안 좋은건 빨리 먹어 없애야지, 나도 좀 줘.
이런 나를 보고 남편과 딸들은 같이 웃는다.
쳇.. 모양 빠진다.
애들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도 나는 사주기전에 신중에 신중을
기울이는데 엄마한테 안 통하는 것도 아빠한테 말하면 바로 나온다.
타협을 해서 저렴한 것으로 사주려하면 남편은 기왕 사 주는거
좋은걸로 해주라며 비싼것으로 결재한다.
엄마는 핸드폰을 쓰게 하는 일에 아주 엄격하지만 아빠는 주말이면
딸들에게 핸드폰으로 아이돌 관련 영상을 찾아보게 해 준다.
이러니 딸들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게 당연하다.
내가 금지하는 것을 남편이 쉽게 허용해주거나, 내가 안 된다고 한 것을
남편이 하게 할때는 가끔 싸울때도 있지만 사실은 딸들과 아빠 사이가
좋은 것이 나도 좋다.
확실히 딸들은 사람 감정을 더 잘 살피고, 마음을 표현 하는 것에도
더 능숙하다. 아들 하나만 키웠더라면 서로 부벼대며 깔깔거리는 기쁨은
애진작에 사라졌을 것이다.
사춘기 아들이 제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퇴근하는 아빠한테 고개만
꾸벅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도 딸들은 마당까지 달려나와 아빠 품에
안기며 환영해주니 얼마나 뿌듯할까.
늦게 아이를 낳고, 그 마저도 터울이 길게 세 아이를 낳고 보니
연년생으로 낳아서 한번에 힘들고 말아야 하는데 언제 키우냐고
주변에선 염려가 많았지만 쉰이 넘은 남편에게 아직도 뺨을 부벼대고
품에 꼭 안기는 어린 딸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요즘이다.
아이들 다 커서 제 세상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부부만 남아서 썰렁한
시간을 보내는 내 또래 부부들을 돌아보면 아직도 어린 아이가 있어
물고 빨며 이뻐하고 사랑주고 사랑받으며 지낼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다.
딸들은 흰머리가 많고 배가 나온 아빠가 잘 생겼다고, 멋지다고 추켜세운다.
만드는것도 잘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도 잘 사주시는 마음씨 넓은
좋은 아빠란다.
늙어가는 아빠가 어린 딸들에게 이렇게 사랑받고 있으니 고맙다.
내년에 열두살이 되는 큰 딸은 조금씩 아빠와 거리를 두려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1학년인 막내가 막강한 애정을 퍼 붓고 있으니
남편의 행복한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듯 하다.
딸들이 아빠보다 남친을 더 좋아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내가 이뻐해주지 뭐..
여보..
믿는 구석이 있으니 마누라한테 더 틱틱거리는거야?
지금은 마누라보다 딸들이 더 좋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