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긴 연휴라 많은 사람들이 들썩이던 주간이 끝나간다. 멀리 떨어져 그런 들썩임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고 있는 나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을 살았다. 아무런 연고 없는 곳에서 편찮으신 노인들을 돌보며 사는 나의 엄마, 그리고 역시 혼자 작은 공장 하나 짊어지고 겨우 한 몸 건사하며 사는 나의 아빠가 적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 가끔 눈에 밟혔지만, 그 마음들을 너저분히 꺼내 놓는 게 구차하고 싫어서 오히려 아무 말도,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이런 명절, 뭐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가족이, 일가친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누군가에겐 즐겁고 또 많은 이들에겐 귀찮고 힘든 ‘명절’이, 나에겐 이제 흉터만 남아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가 된지 오래다. 남들처럼 명절을 보내자면, 무엇보다도 ‘돌아갈 집’, 가족들이 ‘모여들어 앉을 집’이 필요한데, 내겐 그렇게 ‘돌아갈 곳’부터가 없다.
요즘 모두 전세난민, 전세난민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언감생심인, 월세난민이었다. 결혼을 하고 다른 나라로 잠시 나와 살고 있는 지금도 월셋방 살이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서 이방인으로서 겪는 셋방살이가 내겐 차라리 낫다. 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그간 내가 살던 어느 곳보다도 공간이 넓고 쾌적하다고 느꼈다. 여기 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는 심지어 1950년 이전에 지어진, 낡아빠진 학생 기숙사였는데도 그랬다. 그 후 이사를 한번 했는데, 여기는 땅이 넓고 사람들 체격이 커서 그런지 지금 몇 년째 우리 세 식구가 살고 있는 방 하나짜리 작은 아파트도 우리 몸엔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 내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 서울 한복판의 좁은 반지하 방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영세 자영업자 아빠, 식당일 하는 엄마,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등록금마저 면제 받아가면서도 닥치는대로 알바를 해야 했던 나, 그리고 역시 장학금으로 대학엘 다니던 동생. 이렇게 수중에 당장 돈 몇 천만원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4인 가족이 얻을 수 있는 공간은 지방에도, 서울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지방에서도 월세 난민이었던 사람들이 서울에서라고 처지가 달라질 리 없었다. 서울에 살던,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우리 가족은 다세대 주택 1층에서 옆 골목 주택 1층을 거쳐 결국 같은 건물 반지하 방으로 내몰렸다. 기껏해야 5, 6백만원 밖에 되지 않는 보증금마저 다 까인 월셋방에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 다시 힘겹게 보증금을 맞춰내고 지하 방으로 세간을 옮기던 그 날, 나는 조금 서글프긴 했어도 의외로 담담했다. 결혼생활 25년에 10번 가까이의 이사를 반복적으로 겪으며 늙고 지쳐버린 엄마 아빠의 속을 뻔히 알기에, 그저 잠자코 책 짐이며 옷가지를 계단 아래 반지하 방으로 옮겨 날랐을 뿐이다.
‘반지하’ 라지만 실은 그냥 지하나 다름 없는 공간이었다. 2층짜리 건물에 별개의 ‘집’이 셋이나 되던, 그리고 지하와 옥탑까지 포함해 모두 여섯 가구가 들어 살 수 있었던 그 다세대 주택 안에서도 계급은 갈렸다. 지하에 세 들어 살던 우리는, 당연히 그 중 가장 아래 있는 존재였다. 대문을 열고 층계참에 들어서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로 다른 빛이, 공기가, 감돌았다. 대여섯 개밖에 되지 않는 계단이지만, 그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 사이사이엔 우리 네 식구 각자의 하루에 내려앉은 피로와 먼지, 서글픔과 외로움이 밟혔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느껴지는, 아직 한여름이 아닌데도 집안 가득 들어차는 습기는 제습기를 최대로 틀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습기와 곰팡이 때문에 제자리에 붙어있을 줄을 모르는 벽지가 군데군데 우그러들었고, 비가 오면 창문 바로 위로 보이는 하수구로 빗물이 콸콸 들이쳤다.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바꿔보려 창틀에, 현관 앞에 푸른 이파리 식물들을 여럿 사다 놓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때로 그 푸른 이파리들은 푸른 곰팡이와 한데 섞여 집을 더 스산하게 만들었다. 새벽마다 길고양이들이 창가에서 교태를 부리거나 싸워댔고, 몸집이 큰 바퀴벌레들은 말발굽소리를 내며 방안을 가로질렀다. 벌레도 싫어하지만 살충제도 싫어했던 나는, 그 말발굽 소리를 내는 바퀴벌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길다란 살충제 분사구를 갖다 댔다. 그렇게 살충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바퀴벌레가 결국 배를 뒤집어 까고 죽는 걸 보고 있자면, 마치 내가 이 세상 한가운데 빠져 허우적대는 한 마리 벌레인것만 같아 괴로웠다. 엄마 아빠는 이런 주거환경에 놓인 것이 당신들의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 여겨 미안해하거나 괴로워했지만, 나는 뭔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우리 탓이 아니라, 엄마 아빠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화가 났다. 문제는, 그 화를 누구에게 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는 사실이었다.
그 전엔 잘 몰랐던 것들에 눈 뜨게 해 준 건, 2009년의 바로 그 일이었다. 지하로 이사를 하기 얼마 전,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함께 서울역에 나갔던 일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눈발이 날리던 2010년 1월 9일, 서울역에선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장례가 치러졌다. 나를 처음으로 촛불 들고 길거리에 서게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용산의 재개발지구에서 벌어진 그 일은, 내가 차마 눈 질끈 감고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내 삶에 가까웠다. 내가 세상에 하등 도움 안 되는 문학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방에 틀어박힌 사이, 누군가는 ‘철거 용역’이라 불리는 이들로부터 위협 받는 삶을 구해내기 위해 망루를 짓고 올라가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자본의 눈에, 권력의 눈에, 쫓겨나는 이들은 함께 살아가야 할, 또는 보호해야 할 ‘시민’이 아니었다. 용산의 그 사람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의식과 나의 삶을 깨우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논문이 끝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서야 알았다. 그걸 알아챈 뒤에도,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퇴근길 지하철 역에서 용산행 열차를 탈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며 서성이곤 했다. 살기 위해 건물 꼭대기에 올라간 그 사람들은 죽었고, 책 속으로 파고들어 논문 쪼가리나 쓰고 있던, 지하로 내려갔던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지하방에서 도망치듯 나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따뜻한 아이까지 옆구리에 끼고서 말이다. 내가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직후, 아빠와 엄마 역시 각자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빈 몸으로 그 지하방을 떠났고, 단 한번도 ‘우리 집’인 적 없었던 우리의 ‘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불이 난 집을 표현한 아이의 그림>
푸른 하늘이 비치는, 채광 좋은 아파트에서 손아람의 <소수의견>을 읽고 있으니, 끝없는 죄책감이 내 명치 끝을 찔렀다. 그 사람들은 죽었는데,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는 여전히 집은 커녕 방 한 칸 없이 고달프게 사는데, 나 이렇게 염치 없이 쾌적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책을 읽는 내내, 다시 그 침침했던 지하방이, 불에 탄 용산 남일당 건물이, 최근 또다시 거처를 옮긴 예순의 아빠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예순의 엄마가 떠올라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아니, 실은 멀리 바다 건너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곳에도 방 한 칸 없이 임시 거처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먼 곳의 내 피붙이를 생각하며 한숨 쉬는 것조차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바로 얼마 전 읽은 다른 책은, 미국에서 퇴거명령을 받고 거처에서 내쫓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우연히 이 책과 <소수의견>을 연이어 읽게 되면서 한국과 미국, 두 곳을 자연스레 연결지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퇴거명령을 받는 사람들 역시, 월세를 밀리고 밀려 주인에게 내쫓기는 게 대부분이다. 맥도널드, 버거킹 따위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최저시급을 받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생계를 함께 책임 질 남편 없이 홀로 어린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여성들은 월세를 내느냐 다음날 아이를 먹일 음식을 사느냐를 놓고 주저없이 음식을 샀다가 월세를 밀리기 일쑤다. 타국에서 이주해 와서 어린 아이를 키우며 빈곤층 지식노동자로 살고 있는 우리 처지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커다란 대학 캠퍼스를 품고 있어 겉보기에 더없이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동네에도, 외진 곳엔 어김없이 컨테이너 박스나 다름없는 ‘이동식 주택’이 가득 들어찬 트레일러 파크가 들어서 있다. 시내엔 하루아침에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임시 숙소가 마련되어 있고, 이 동네의 ‘강북’과 ‘강남’을 가르는 길다란 강가엔 이동식 주택에도 임시 숙소에도 들어갈 수 없는 노숙인들이 텐트를 치고 사는 텐트촌이 들어서 있다. 컨테이너 박스 같은 집들이 늘어 서 있는 트레일러 파크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이들의 고단한 삶이 가득 들어 있다. 그리고 강변의 텐트촌에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저 하루 먹을 식량이나 있으면 다행인 사람들끼리 사소한 다툼 끝에 서로를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쏴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 동네 신문 한 켠 ‘오늘의 사건사고’에 실린다.
대체 왜 이 풍요로운 나라에서, 주택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은 우리 동네에서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거처를 빼앗겨 거리로 나앉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삶이나 말이나 행위가 아닌 ‘신용’이란 이름으로 그가 가진 돈, 혹은 돈과 관련된 그이의 궤적으로만 재단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나는 아무리 해도 좋아지지가 않는다. 왜 사람들이, 경찰이, 국가가, 누구는 우리의 이웃이자 시민으로 보고 누구는 시민이 아니라 범법자로, ‘테러리스트’로 보는지, 도대체 이해하고 싶지가 않다. 한국에선 어째서 힘 있고 돈 있는 이들이 ‘철거 용역’을 매수해 사람들을 때리고 집기를 부수어가며 쫓아내고, 미국에선 어째서 ‘철거전문 센터’ 직원들이 들이닥쳐 가구와 집기를 쓰레기 취급하며 아무데나 던져둘 수 있는지,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큰 물음은, 이것이 정말 ‘소수’의 일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어느 기사에 따르면, 지금 한국에는 만 19세 이하 아동(어린이/청소년) 10명 중 1명꼴인 94만명이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11717.html)
이곳 미국에서 우리 아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도, 주거빈곤 상태에 놓인 아이들이 여럿 있다. 이제 겨우 만 네 살, 다섯 살 아이들이 친척집을 전전하거나 모텔방을 옮겨다니며 지내고, 침대가 없어 카펫 바닥에서 생활하다 벌레에 물리고 병에 걸리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바로 내가 겪었고, 지금 바로 내 주변, 내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에 나는 더더욱 이 일을 ‘소수’의 일이라 치부해버릴 수가 없다.
소수의견. “다수결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다수의 찬성을 얻지 못한 채 폐기된 의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집을 잃었거나
언제든 잃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까, 다수일까?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 남의 집을 빌려 쓰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아무 무리 없이 집주인이 원하는 만큼 보증금을 올릴 수 있거나 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까? 하찮은 집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살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뿔뿔이 흩어져 거리를 전전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하다 보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다시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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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손아람, 소수의견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64829
매튜 데스먼드, 쫓겨난 사람들(Evi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