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년 전, 낯선 남자 두 명이 우리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가방을 메고.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와 3주 동안 같이 먹고 자며 아이와 나의 일상을 카메라로 담았다. KBS 인간극장 팀은 3주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가족이 됐다. 잠을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함께 잘 때 비로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KBS 인간극장팀은 3주동안은 그런 가족의 기준을 충족했다. 아침에 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었으며 같은 집안에서 잠을 잤다. 남의 집이 불편할 텐데 그 두 사람은 행여 누를 끼칠까봐 항상 웃는 얼굴로 민호와 나를 편하게 했다. 민호는 그들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이들과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도로 아래 깔린 가을 낙엽을 보면 그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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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들이 꼭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회사팀 반응이 그랬어요. 출연을 하는 이유가 뭘까 라는 반응이요.”
소위 사회적으로 나쁘지 않은 직장을 다니거나 나쁘지 않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섭외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는 경험도 함께 털어놓았다. 그들은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나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다. 모든 가정마다 사연 하나씩은 다 있을 거라면서.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고 했다. 의사든 변호사든 그들은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공개하기를 무척이나 꺼려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기자 생활을 계속했더라면 꼭 취재하고 싶었던 게 바로 강남의 자살 실태였다. 선망하는 지역에서도 예상밖으로 많은 이들이 삶을 스스로 끊었다.
“전 부모가 혼자인 상태로 민호를 초등학교에 보내기가 두려웠어요. 그래서 다 공개하기로 했죠. 행복은 가족의 숫자에 있는 게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한창 일할 나이인 남성이 오전부터 아이 손을 잡고 길거리를 다니면, 가끔씩 나와 아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눈빛을 만나곤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나이 또래 남성을 오전이나 오후에 길거리에서 만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슬픔은 감추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TV 출연으로 민호뿐만 아니라 출연한 가족이 모두 큰 위로와 격려를 받을 거라는 것, 때문에 모든 가족들을 반드시 출연시키라는 것. 이 세가지는 각기 다른 심리 전문가들을 만났을 때 들었던 공통적인 내용이었다. 서로 다른 얼굴이 똑같은 예측을 하면 난 그 예측을 따랐다. 오랜 기자생활이 가르쳐 준 일종의 습관이기도 했다.
몸서리가 친다 라는 의미를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친가와 처가의 반대는 극심했지만, 그래서 그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슬픔을 공개하고 나니 많은 분들이 전문가의 예상대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부모님은 방송이 나가는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와 위로의 말을 전했고, 민호는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학교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갔다. 등하교 때마다 이웃들은 민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입학하자마자 글짓기를 비롯해 여러 상장까지 받아 왔다. 1학년 2학년 모두 학급의 임원으로 뽑히니 비로소 불안의 크기만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평화는 잠시 뿐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접어들면 기뻐야할 텐데 오히려 공허함이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더니 점점 더 커졌다. 이게 빈집 증후군이라는 건가? 사춘기 아이들이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 텅 빈 집안에 혼자 남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40대 엄마들처럼, 불안과 걱정이란 감정이 내 곁을 떠나고 나니 혼자 집에 있을 때엔 집안 살림을 하고 있는 내 삶이 초라해 보였다.

 

대학원에 입학 지원서를 낸 건 그 무렵이다. 앞으로 십년 뒤 내 명함을 상상하며 대학원의 문을두드렸다. 심리상담전문가겸 작가. 심리상담가와 작가 가운데 어떤 모습이 더 행복할지는 아직도 일상 속에서 점검 중이지만, 아내를 갑작스럽게 여의고 찾아온 슬픔 속에서 나와 아이를 구해준 심리학을 적어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 공상을 하는 사람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아무런 연관없는 행동을 하며 상상만 할 테지만, 꿈을 이루는 자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리며 오늘하는 일과 연관을 지으며 조금씩 그 꿈에 다가갈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조금씩 앞으로, 조금만 더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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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보면 한 장의 추억이었지만 대학원 구술 면접을 보러간 날엔 무척이나 긴장을 했다. 수험생 대기실에서 조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세 명의 수험번호를 부르던 모습도 아직도 눈에 선한 걸 보면 기억의 정도도 감정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면접은 한번에 세 사람씩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진행됐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자 라고 다짐을 하는 사이 조교는 어느덧 내 수험 번호를 불렀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 사람이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각자 자기 자신을 1분 안에 소개해보세요.”
마주보며 앉은 여자 교수님이 자신을 소개해 보라고 했다. 영화 ‘올드 보이’에서 주인공이 “’누구냐, 넌?” 이라고 물었던 것처럼 마치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듯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왜 여기에 와 있나요?
모두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무런 말이 없자 조급한 마음이 밀려와 먼저 입을 땠다. 방송 생활 덕분에 머릿속에서 시계가 짹깍거리며 흘러갔다. 60초의 시간, 여섯 문장에서 일곱 문장이면 1분이 지나간다. 그 여섯 일곱 문장 안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냥 있는 나를 그대로 드러내자 며 평소에 갖고 있던 마음이 언어로 흘러 나왔다.

“아내와 예상하지 못한 이별을 했습니다.
아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 삶도 언젠가 끝난다는 걸 가슴 깊이 배웠습니다.
제 삶이 어느 순간 끝이 난다는 걸 배우니 제 삶이 무척 소중히 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전 제 삶을 무척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 삶을 사랑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삶도 무척 소중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하고 싶었습니다.
심리상담을 통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일으켜 세우고 싶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그렇게 1분 동안 이 자리에 앉은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수험생들도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자기 소개를 할 때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감정이 다시 잦아들기까지엔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술가로서도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책에서 행복의 조건을 두 가지로 소개했다. 하나는 삶에서 목표를 가질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면 인간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불행하고, 또 목표가 있더라도 그 목표가 너무 크면 오히려 좌절감과 실패감 때문에 불행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느낌을 가질 때, 삶이 행복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목표가 없어도, 목표가 너무 거대해도, 삶은 불행감에 휩싸일 수 있다.

 

내가 세운 목표가 너무 거대한 걸까? 내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웠다면 오히려 그 꿈은 나를 더 힘들 게 할 것만 같았다. 대학원에서 떨어진다면 오히려 꿈을 꾼 시간과 깊이만큼 내가 더 힘들 테니까. 대학원에 합격을 한다면 길버트 교수의 말대로 심리상담 전문가란 목표에 점점 더 다가간다는 느낌에 행복할 것 같았다. 기대한 결과가 아니라면 그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한 괴테의 말처럼 나다운 길을 찾기 위한 방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졸이며 한 달여의 시간을 기다렸다.

 

합격자 발표날, 그리고 합격을 확인한 그 날, 길버트 교수가 말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느꼈다. 꿈을 그리고 그 꿈에 다가갈 때 갖는 느낌. 들뜬 행복의 느낌이 온몸을 감싸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마법에 걸린다. 연필을 기다리는 연필깎이가 고마워 보였다. 배가 부른  돼지 저금통까지 고마워 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온 몸으로 추위와 더위를 막아 내며 바깥 세상을 보여 준 커다란 창문에게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 창문을 덮어주던 커튼도 예뻤다. “모든 새로운 시작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고 한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새로운 꿈의 시작을 알리는 길 앞에서 주변 사물들 하나하나가 고요한 가운데 아우성을 치며 박수를 쳐 주는 듯 했다. 그렇게 기자의 길에서 나온지 3년이 되던 해 새로운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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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올해로 꼭 마흔. 꿈이 고마운 건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때문이다. 다만 거창하거나 남을 의식한 꿈을 꾸지는 않기로 했다. 결과보다도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 더 행복한 꿈을 꾸기로 했다. 숲길을 가는 건 걷는 게 목적이지 숲길을 빨리 통과하는 게 목적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오늘도 꿈을 꾼다. 배우는 걸 멈추지 말자는 꿈.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자는 꿈. 아이와 함께 야구를 하는 아빠로,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그리는 꿈까지 가끔씩 그려봤다. 어떤 꿈은 스치는 꿈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꿈은 공상 수준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내 모습을 보면 적어도 ‘심리전문상담가겸 작가’란 목적지를 향해 밤에도 낮에도 조금씩 걸어가는 듯 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척박하고 메마른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내가 가야할 곳이 있고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일 것만 같았다. 민호가 학교에 잘 적응을 한 뒤 공허함이 찾아와 새로운 꿈을 발견한 것처럼 어쩌면 앞으로도 새로운 꿈을 그리고 그 꿈을 다 그리고 나면 또 다른 꿈을 그려나갈 것만 같았다. 새로운 꿈을 그린다는 건 어쩌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다. 살아있는 한 그렇게 머무르지 않고 변해야만 했다. 

 

난 사람들이 많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 거대한 꿈이 아닌 작은 크기의 여러 꿈들. 하늘의 별들처럼 광장의 촛불처럼 그 꿈들이 어둠을 밝히고 자신의 삶을 밝히면 그 꿈의 온기들이 앞으로 옆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줄 것만 같았다. 또 수백 만 광장에 촛불이 켜진 것처럼 그 꿈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 속에도 타오르며 꺼지지 않기를 바랐다. 완성된 꿈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젊고, 우울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도 활기찰 것만 같았다.


꿈을 간직한 그 촛불이 광장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남아 일상과 삶 속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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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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