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힘든 2016년이다. 

연초부터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 내내 힘들었는데, 

10월에 들어서면서 더 많은 일들이 생겨 온 몸과 마음으로 앓아야 했다. 

10월이 지나면 한 숨 돌릴 수 있을까, 했더니 

11월엔 더 큰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이곳에선 혐오와 배제의 트럼프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그곳에선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수십년 전의 시간에 멈추어 살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속속 드러났다. 


허망하고 개탄스러운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이 곳의 한국인들도 미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모임을 기획하고 있는데, 내가 있는 이 곳 대학가에서도 그런 모임이 바로 어제 저녁에 있었다. 

하필 행사를 시작하기로 한 시간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순간 우왕좌왕했지만, 

오늘을 위해 일주일을 달려왔다는 생각에 장소를 옮겨 행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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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 준비단을 꾸려보고 싶다는 한 대학원생의 제안에 응답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일주일 동안 열심히 머리를 맞댄 결과였다. 국문/영문으로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을 받았다. 

처음엔 우리가 있는 이 대학 한인구성원을 대상으로 진행했는데 주변 다른 대학 한인들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범위가 커졌다. 그 결과 단 1주일 만에 미국 전역 138개 대학에 있는 한인 92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시국선언문을 공동 작업하는 과정에서 스무 명 남짓한 우리 준비단 구성원들은 밤 늦도록 한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따라 읽고, 토론과 투표로 선언문의 방향과 어조를 함께 고민하고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것은, 우리가 정말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살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토론과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 곳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분위기에서 열띤 토론을 할 수 있는 시민의식을 키워야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고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교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 행사에서 선언문 낭독 전에 있었던 자유발언 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퇴진과 처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습을 고민해야 한다. 어떤 방식의 체제와 어떤 모습의 정치를 원하는지, 자유와 평등, 사회 정의와 같은 가치를 놓고 무엇에 우선 순위를 두어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함께 이야기하며 '진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 사태로 더 이상은 "정치는 내 일이 아니다" 혹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똑바로 일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부터 진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는 길은 광장에 모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특히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우리 엄마, 아빠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는 법을 몸소 보여주고,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이런 시민성을 배우고 익혀나갈 수 있도록 교육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데 힘써야 한다. 


"가장 조기 교육이 필요한 건 영어도 수학도 아닌 민주주의" (김규항) 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미국 대학 연합 시국선언문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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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행사 전 과정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엄마가 마이크를 잡는 낯선 광경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케이티의 모습을 구경(?!)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 발언자로 나온 남성은 저의 남편이자 케이티의 아빠입니다..... 물론 아빠가 마이크를 잡는 것 역시 낯선 모습이었기 때문에 케이티는 현장에 가까이 가는 것 조차 거부했다는 후문이...)



https://www.facebook.com/declarationforkorea/videos/13032139411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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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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