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서 보조적 존재 취급받는 ‘아빠’ 
“엄마 아니어서” 트집 안 잡히려 만반의 준비

147892062546_20161113.JPG » 아이가 막무가내로 풍선공을 던진다. 내 기분은 중요치 않다. 아이가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찾는 나는 ‘주양육자’다. 한겨레 이승준 기자
18개월 아들을 키우는 A는 오랜만에 저녁 약속이 생겼다. 퇴근한 B에게 아이를 맡기고 감기약을 먹여 재우라고 당부한 뒤 서둘러 집을 나왔다. 하지만 곧 울리는 카카오톡 메시지 알림에 A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떡해, 나가자마자 울어! ㅠ 계속 울어.” “얘가 왜 그러지? 미안한데 다시 와서 재우고 가면 안 될까?” “내내 울다가 겨우 잠들었어-_-;;”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은 무의식중에 A는 엄마, B는 아빠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A는 아빠인 나고, B가 엄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의 풍경이다.

이제껏 우리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은 이 장면에 대해 “○○가 아빠에게 애착이 형성된 것 같네요. 이모님(베이비시터)이든 누구든 주양육자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면 된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아빠를 받아준 아들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왠지 뿌듯했다.

아내의 복직 날짜가 다가오며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떠밀리듯 육아휴직계를 회사에 올릴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주양육자’가 된 것이다! 지금도 아이는 엄마와 잘 놀다가도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등 아쉬울 때면 나를 찾는다. 자신을 주로 돌봐주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물론 애착 관계 형성은 아기마다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나를 육아에서 보조적 존재인 ‘아빠’로 본다. 아들을 데리고 외출하면 “엄마는 어디 갔니?”라고 매번 받는 질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다. “엄마는 회사 갔어요”라고 답하면 돌아오는 단골 멘트 때문이다. “아유, 엄마랑 떨어져서 어떡해. 아이가 딱하네.” 그래서 아들과 둘이 외출할 때는 옷차림은 물론 손톱 길이까지 점검하며 만반의 준비를 한다. ‘엄마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괜한 트집을 안 잡히기 위해.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특별 대우’를 받게 된다. 얼마 전 어린이집 소풍에서 참석자 중 유일한 아빠였던 나는 선생님과 엄마들의 진심 어린 호의에도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는 당연한 일에 ‘동지’들은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행여 실수할까 버선발로 달려오는 모습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초딩’의 심정이 돼버렸다. “늘 하던 일인데! 나도 잘할 수 있다고요!” 물론 속으로 삼켰지만.

남성의 육아휴직에 태클(?) 걸지 않는 <한겨레> 덕에 ‘다행히 육아’(고용노동부 최근 발표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는 아직도 전체 휴직자의 7.9%에 불과하다)를 한 지난 몇 달은 엄마에게만 육아 책임을 씌우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관념을 절절하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동네 아파트 단지를 하루만 관찰해도 현실은 ‘주양육자=엄마’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기들의 손과 유모차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베이비시터, 어린이집 선생님 등 다양한 양육자들이 잡고 있다. 맞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로 육아휴직을 선택한 나처럼, 각각의 집안 사정과 가족 형태에 따라 ‘엄마가 아닌’ 주양육자를 선택하고 있다.

이렇게 아빠의 육아력(?)을 뽐내봤지만, 실은 나도 아이가 아프거나 이상행동을 보일 때면 엄마가 아니어서 그런가 싶어 의기소침해진다. 하지만 주양육자의 얼굴이 다양해질수록 육아라는 책임과 부담을 엄마에게만 전가하는 왜곡된 한국 사회의 모습이 더 빠르게 변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당장 나부터 엄마들이 겪는 스트레스, 우울함, 경력 단절 공포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양육자다. 누구나 주양육자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한겨레21 제1136호(2016.11.1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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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남성의 육아휴직에 태클(?) 걸지 않는 <한겨레> 덕에 육아휴직 중. 아이가 아프거나 이상행동을 보일 때면 엄마가 아니어서 그런가 싶어 의기소침해진다. 하지만 주양육자의 얼굴이 다양해질수록 육아라는 책임과 부담을 엄마에게만 전가하는 왜곡된 한국 사회의 모습이 더 빠르게 변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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