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육아>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단단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읽기 시작한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아주 많은 것들을 혼자 힘으로 터득해 왔다.

갓난아기들을 보라. 그냥 하루종일 놀고 먹고 사고치면서 배운다.

뒤집기, 일어나기, 걷기, 달리기, 모국어 역시 순전히 독학!으로 깨친다.

누구도 특별히 가르치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배움은 일어나는 법.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사건, 춘하추동과 천지만물이 다 나의 스승인 셈이다.

... ...

사방에 정보가 널려 있고, 지식인도 넘쳐난다.

그렇다면 도처에서 배움과 가르침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지식과 대중, 공부와 일상이 나누어진 시대도 드물다.

도무지 가르칠 엄두도, 배울 생각도 하질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교육과 화폐의 결탁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고미숙 -


교육과 화폐의 결탁.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아기가 뒤집기를 하거나 걷는 것 조차 학원에 가서

배우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돈을 주고 배워야 제대로 배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견교한 결합을 어떻게 해체시킬"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그 전부터 돈 걱정을 하면서도

어쩌면 부모들은 '돈을 쓸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이의 여러 발달을 위해 각각의 교육과 관련용품 구입에 돈을 분배,

투자하는 것으로 일단 안심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돈의 달인>에 자주 인용되었던

비노바 바베의 <버리고, 행복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빨리면서 기쁨을 느낀다.

만일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돈을 요구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 우리는 이렇게 방랑하는 교사의 전통을 다시 세워야 한다. ...

모든 가정은 학교가 되어야 하며, 모든 들판은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큰아이가 만3,4살이 되었을 무렵,

주변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교육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할 때

나는 어린이용 부엌칼을 아이가 몇 살 쯤에 사 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엄마였다.

국제 전화로 한국 친구들에게 이런 육아상담을 할 때면,

전화기 저 편에서 한동안 침묵이 흐르곤 했다.

되도록 학원에 보내지 않고, 불필요한 교육을 아이에게 시키고 싶지않다는 내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한국에 안 사니까 그렇지."

혹은

"너처럼 그렇게 말하던 엄마들, 아이가 초등 고학년되면 다들 땅을 치고 후회한다던데."


나 나름의 생각과 직감으로 지금까지 학원에 보내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정말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조금은, 일부러라도 불안해 하는 것으로, 미래에 겪게 될지도 모를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자책에 대비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큰아이는 12살, 드디어 초등5학년이 되었다.

아니 이제 해만 바뀌면 초등의 최고학년이자 마지막, 6학년!

중학교 갈 날이 정말이지 낼모레가 된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예언 혹은 장담했던,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은 아직 벌이지지 않고 있다.(좀 더 지나면 일어날려나..?)


며칠 전에 아이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아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연 나에게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음..   마음 속에 깊은 뿌리가 있다고 할까.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전 미술 시간에 문자 디자인을 하는데, 어찌나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하는지..

고학년 아이들은 생각하길 귀찮아 하고 대충 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자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걸 무척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답니다.

다른 반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샘플로 쓰고 싶다고 그림을 들고 가시더라구요."


DSCN3802.JPG

마침, 교실 복도에는 선생님이 이야기한 우리 아이의 문자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한자, 한 글자를 선택해 디자인을 해야 한다며
집에서 숙제로 밑그림을 그려가더니 거기에 색을 입혀 완성한 그림이었다.
'밤 율'  
밤, 고구마, 땅콩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큰아이다운 글자 선택이어서
보는 순간, 풋 하고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이 그림 한 장에 아이가 지나온, 지난 12년이 담겨있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대상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
그렇게 보고 느낀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결과물보다 그 표현의 과정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하기.
다른 아이들 그림도 참 독특하고 좋은 게 많아서
그냥 여러 그림들 중에 한장이었지만,
엄마인 나에겐 우리 아이의 정성과 진지함이 느껴져,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다.

순간, 아주 오랫동안 내게 의문스러웠던 문제 한 가지에 대한 답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교육이란 게 결국 외부로부터 입력되는 것인데, 양적으로 너무 치우친 교육은
그 아이만이 가진 본연의 것이 자라게 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나는 늘 그게 걱정이었다.
시절마다 유행하던 이런 저런 교육. 다 나름의 장점은 있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우리 아이만이 가진 개성과 상상력, 아이디어는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인데, 심지어 같은 유전자를 나눈 부모와도 미묘하게 때로는 확연히 다르고 새로운데
그런 소중한 것들이 채 꽃피기도 전에 묻혀버린다 생각하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우리 아이도 다른 12살들처럼, 말을 안 듣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 되었고
공부도 은근슬쩍 꾀를 피우고 자기 방은 엉망진창에 ... 뭐 그렇다.
하지만, 곁에서 보고 있으면 사는게 참 즐거워 보인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그걸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 속에서 행복해 보인다.
'거긴 한국이 아니니까 그렇겠지.'  다들 그런다.
하지만, 한국보다 전반적으로 좀 덜 할 뿐, 공부와 학원문화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요즘, 큰아이가 다시 아기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는 상상을 혼자 할 때가 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 남 눈치보지 말고 더 과감하게, 내가 키우고 싶은대로 키울거야.
- 숲놀이 그룹을 만들어 1살에서 10살까지,
   틈만 나면 숲에서 놀고 먹으며 딱 10년만 열심히 해보고 싶어.

<돈의 달인>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있었다.
"유형의 돈을 모으는 건 무형의 마음이다."

공부라는 것도,
결국 유형의 돈보다 스스로 하려는 "무형의 마음"이 먼저가 아닐까.
아이가 그런 마음의 힘을 기르고 단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일인 것 같다.
지난 10여년이 그랬던 것처럼, 큰아이가 성인이 되는 앞으로의 10여년도
우리 가족이 선택한 교육방침은 이 말 속에 다 담겨있다.

모든 가정은 학교, 모든 들판은 실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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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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