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반짝하고 끝날 줄 알았던 육아예능 프로그램이 여전히 인기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못마땅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 엄마들의 고충에 대해
아빠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된 것 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엄마들이 2박3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지, 친구를 만나러가는 건지, 여행을 가는 건지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자기만의 짐이 담긴 트렁크를 끌고 집을 나서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참 부러웠다.

<전담육아 12년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썼듯
그간의 오랜 기다림과 치밀한(?) 준비로 나도 드디어,
식구들 다 떼놓고 혼.자. 떠났다.
남들은 겨우 3일? 그럴지 모르지만,
전업주부의 거미줄과도 같은 촘촘한 일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잠깐이라도 빠져나온다는 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우리를 섭외해주지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2박3일(이렇게 짧은 일정으로 비행기표 끊어보긴 내 평생 처음;;
                                아이들 학교 일정에 내가 빠지면 안되는 일이 있어 울며겨자먹기로)
여행지는 어디로 정할까.
나는 워낙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호젓하고 고즈넉함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오래 찾아뵙지 못한 친정 부모님의 기다림을 외면하기가 어려웠고, 친구들도 너무 보고 싶었다.
또 처리해야 할 이런저런 일도 있어, 나홀로 여행의 첫 방문지는 내 고향 부산으로 정해졌다.
우리 가족이 사는 일본 도쿄(사랑이네도^^)에서 한국 부산까지!

여행 떠나기 전날, 나 하나만을 위한 짐을 싸니 이렇게 간단할 수가.. 감동적이었다.
친정 식구들, 친구들, 지인들 선물을 골고루 챙겨넣어도 여백이 남다니.
여행 시작도 하기 전에 '또 가야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행복에 겨워 짐을 꾸리는 내 뒤에는 어둡고 우울한 얼굴을 한 남편이..^^

집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풍가는 아이 도시락싸랴
학교 준비물 챙기랴 남편에게 이것저것 확인하고 지시하랴.. 혼이 빠질 것 같았다.
그런 난리법썩의 아침을 보내고 공항리무진 버스에 올라앉으니,
아.. 천국이 따로 없구나.. 이제 정말 혼자다!

DSCN3708.JPG

친정방문을 하려면 바다와 국경을 넘어야 하는 나에게
고향은 늘 이미 알던 것을 새롭게 느끼게 해 준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곁에 있었던 바다가 이렇게 지도를 통해 보니
참 새롭다. 어릴 때 우린 주말에 모래장난하러 가는 곳도 바다였고,
가족과 나들이를 가거나 좀 더 커서 학교 때 M.T를 가는 곳도 남해, 충무, 통영, 거제도와 같은
바닷가였다. 한반도의 남동부에서 나고자란 내가 같은 한국이지만, 강원도에 갔을 때 본 바다는
첨엔 좀 충격적이었다. 잔잔하고 드넓게 펼쳐진 남해안의 바다에 너무 익숙해서였는지,
동부 쪽 바다는 색깔도 검푸르고 바람도 강해 철썩철썩 빠른 리듬으로 밀려오는 큰 파도가
어쩐지 무섭고 낯설었다.
오랫만에 이렇게 지도로 보는 내 고향 부산이 반가워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DSCN3703.JPG

아! 나의 친정. 나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곳.
나는 집안 곳곳을 어린애마냥 둘러보며 "아직도 이게 있네!" 하며 외친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내가 동남아 어딘가를 베낭여행하고 돌아올 때 사왔던
대나무로 만든 풍경이 아직까지 집 안에 걸려있었다.
"이걸 아직도 안 버렸어요??" 그러니,
"그걸 와 버리노? 니가 사갔고 온긴데."
흔들어보니 아직도 맑은 나무 소리가 아름답게 울린다.
냉큼 드는 생각이,  '이거 우리 일본집에 가져갈까?'..;; ^^

오래된 살림살이라곤 믿겨지지 않을만큼, 몇 십년 세월의 물건들이
반질반질 윤이 난다. 오랫만에 딸이 온다고 닦고 또 닦고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갔을까.
나를 위해 뽀송하고 깨끗하게 빨아 차곡차곡 접어둔 수건들, 따뜻한 김이 솔솔 나는 음식들..
그 속에 깃든 자식을 향한 부모의 오랜 기다림과 정성에 울컥한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5일의 마중>이란 영화가 문득 생각나기도 한다.
이 말할 수 없는 안락함, 따뜻함, 평화로움..
우리 아이들도 나와 있을 때 이런 느낌일까.

DSCN3705.JPG

비행기까지 타고 갔는데 고작 이틀밖에 시간이 없다. 마지막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떠나야하니.
아버지 차를 얻어타기도 하고 지하철로 갈아타기도 하면서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내가 살던 90년대는 없었던 4호선을 처음 탔는데
지하철역 안전창 벽 곳곳에 시가 적힌 그림이 있다. '시가 있어 행복한 도시철도'란다.
이런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베이비트리의 '시읽는 엄마' 때문이다.
여러 시 중에 <멸치>는 남해안에 있는 도시,
부산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찍어보았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응어리지고 애가 타는 일'
아무렇지 않게 발라내던 멸치의 까만 부분을 이렇게 연관시키다니.
<간장게장>의 계보를 잇는 아름답지만 가슴아픈 통찰..ㅎㅎ
지하철이 달리는 내내, 이 시가 있어 심심하지 않았다.

DSCN3725.JPG


나는 이상하게도 살면서 이런 일을 참 자주 겪는다.

지하철에서 <멸치> 시를 읽으며 만나러 간 친구가, 한보따리 내놓는 선물이

다름아닌  멸.치. 였던 것이다. 상자를 열어보자마자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내가

왜 그런지 의아해하면서도 친구는, 머리랑 내장이랑 자기가 직접 손으로 다 한 거라며

큰 다시멸치부터 볶음용 잔멸치까지 종류별로 우리 시댁몫까지 야무지게 챙겨 주었다.

부피가 크면 외국까지 가져가기가 힘들거라며,

진공포장해주는 곳을 찾아가 일일이 포장을 다시 했단다.


지난 몇년간 서로 폭풍육아의 터널을 지나느라 정말 오랫만에 얼굴을 보는 이 친구는

통영으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정착해 사는 직장맘이다.

멸치는 그녀가 살고 있는 통영의 제일가는 특산품이었던 것이다.

부산과는 또다른 남해안 소도시에서 사는 이야기, 그곳 사람들과 소박하지만 일상을 나누는

문화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큰 멸치보따리만큼이나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DSCN3716.JPG


우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곳은 부산의 어린이서점, <책과아이들>.

90년대에 나와 함께했던 부산의 내 친구들,

그리고 선배들은 이 공간에서 자주 어울리며 새로운 삶과 교육에 대해 꿈을 꾸었다.

마당에는 닭이 있고 아이들 자전거가 세워져있고 새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 이쁜 책들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맑은 공기와 차를 마시며

20년지기 친구와 함께 있다니. 꿈만 같았다.

통영 친구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자니,

반가운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어느새 북적댄다.


우리는 모두 책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여자들이라

한참 수다를 떨다가도 이쁜 책들이 꽂힌 서가가 눈에 들어오면 거기에 홀려

모두들 책에 또 빠져든다. 그 책 읽어봤어? 이 책 좋더라.. 아이들 얘기보다 책 얘기가 더

신이 나는데.. 20년 전에도 그러더니, 지금은 결국 모두 비슷비슷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도서관 사서. 동화작가. 어린이서점 주인. 국어교사, 영어교사, 특수교육교사.. 그리고 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보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참 비슷하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사서 친구는, 다음주에 <김남중>동화작가와

작가와의 만남을 앞두고 잔뜩 들떠 있었다.

김남중 작가의 팬인 나는 친구에게 미리 준비해온 선물까지 맡기고..^^

40대에도 여전히 소녀같은 이 아줌마들을 어쩌나.


DSCN3730.JPG

왁자지껄 떠들다 함께 돌솥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내가 사들고 간 달달한 일본 과자들을 먹는 시간이 꿀처럼 달콤하다.
첨엔 2박3일이 너무 짧아 한숨이 났는데, 이렇게 짧지만 진하게 하루종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 정도로도 가슴 속에 충만함이 가득했다.
친구 중 하나가 내가 읽고싶다며 미리 얘기해뒀던,
오소희의 여행책들에 손수 만든 북커버를 씌워 건네 주었다.

몸이 약한데다 거북이 목이라서 병원에서 독서금지령이 내린 이 친구가
퇴근하고 나서 밤마다 한땀씩 더디게 바느질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마워. 친구들아. 가서 잘 읽고 또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할께..
꿈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이, 친정집에서 걸려온 전화가 불이 난다.
"빨리 안 오나?!"

번개불에 콩볶아먹듯 다니러 간 친정.
도쿄행 비행기에 타고나서야 휴.. 한숨이 쉬어진다.
비행기 수하물칸에 실린 내 가방에는 김치, 미역, 김, 멸치, 국간장, 당면, 과자들,
그리고 나와 한국을 이어주는 탯줄과도 같은 소중한 한글 책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모와 내가 자란 집, 고향, 친구들, 내가 머물렀던 자연과 공간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그 곁을 떠난 다음에도, 나를 여전히 키우고 있다는.
곁에 없어도 나를 지키고 키워주는 것들이라는..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아이들이 자라 내 품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들을 키우게 만들, 소중한 것들을 쌓아가는 때라는 걸.
내가 다시 돌아가 아둥바둥하게 될 일상이
바로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하루하루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
모두모두 고마웠어요. 또 만나러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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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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