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간의 동거가 끝이 났다.

 

올해는 며칠 동안 제주에 계실까 궁금했는데 지난해에 비해 한 달이나 체류기간이 늘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을 손자 얼굴도 보고 새집 구경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허리수술로 인해 손자 보는 중노동을 하며 집에 오래 계시지는 못 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정도면 꽤 잘 버티신 듯하다.

지난 한해의 두 달 동거를 떠올리자면 평생에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가족으로 구성되어 함께 사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루도 (함께 지내기) 힘들어하는 사이’를 참고 지낸 두 달이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올해는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를 돌봐야 하는 일이 워낙에 큰 비중으로 다가오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픈 허리로 아이를 돌보고 집안 청소를 도맡아 하시느라 고생이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둘째에 집중하고 매 끼니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또한 점점 일의 비중이 커지고 새로 이사 온 서귀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약속이 늦어져 밤 10시가 되면 꼭 ‘엄마’의 귀가 독촉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아이보기 힘드니 어서 바톤 터치하자’는 뜻으로 들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엄마가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 아내의 요리를 엄마가 곧잘 드셔서

석달 동거 내내 불편함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에피소드와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이 가까운 듯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가 뽀뇨를 재운다고 일찍 방으로 들어간 어느날 밤, 나는 일찍 집에 들어와 쇼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들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설거지를 하는 엄마가 혼잣말로 불만을 늘어놓으셨다.

금방 설거지를 했는데 싱크대가 다시 지저분해졌고 이를 치우려고 하니 식기세제가 제대로 거품이 나지 않아 신경질이 난다는 내용이었다.

옆에서 못들은 척 하기는 했지만 나 또한 신경이 거슬렸다.

 

남이 하는 설거지가 마음에 100% 드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청소를 꼼꼼이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와 같은 방식이 아니어서 불만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쉬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야 하는데

혹여 엄마의 혼잣말을 아내가 듣고 마음상해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도 어떤 때는 설거지하며 혼잣말로 불만을 늘어놓고 싶을 때가 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식기세재가 친환경이다보니 거품이 나지 않을 때도 아이생각에 귀찮고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지 하며 넘기고 만다.

 60년을 넘게 살아오며 ‘거품도 제대로 나지 않는 식기세재’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결국 아내 몰래 친환경 세재액을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친환경을 써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나의 설거지 스타일은 이러하다는 것을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도 있는데 여러모로 그 단계까지 가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엄마가 창원으로 돌아가며 아내에게 ‘행주는 꼭 물기를 제거하라’는 구체적인 당부를 남기셨다고 한다.

아내는 시어머니와의 석 달간의 시간이 고맙고 편안하기 까지 했다고 하지만

딱 한가지 ‘살림살이’에 대한 부분은 잘 맞지 않다는 점을 내비쳤고 어머니가 아마도 불편하셨을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가르쳐 주려는 것 일테고

아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는 점을 시어머니에게 설명하려고 했으리라.

 

어찌보면 나는 아내보다 어머니를 잘 모른다.

내가 고향집을 나온 중학교 2학년때 이후로 엄마의 겉모습만 보아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관찰력이 유난히 좋은 아내를 통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석 달 간의 소통,

어찌 보면 갑갑하고 지난하며 한계를 미리 설정해 놓기가 쉬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이지만

이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온 어머니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친환경 세재를 싱크대에 쏟아 부은 시어머니이지만

나에게는 ‘며느리 힘드니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와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석달간의 소중한 시간은 막을 내렸다.

뽀뇨와 할머니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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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이메일 : pporco25@naver.com       트위터 : pponyo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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