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또 다시 바자회의 계절이 찾아왔다.
동네 자치회를 시작해 각 유치원과 학교마다
9,10월에 걸쳐 주말마다 바자회를 개최하는 곳이 많다.
암묵적인 약속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행사가 서로 겹치지 않게 이번주는 00유치원,
다음주는 00학교, 이런 식으로 날짜가 잡혀있어 우리가 사는 동네 반경 1km 이내의
바자회만 다녀도 이 가을이 다 끝나갈 정도고,
각 바자회마다 특색이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다니기도 한다.
어른들은 주로 기증받은 물건들을 싼 값에 판매하는 중고품 가게를,
아이들은 야외에서 판매하는 빙수나 팝콘, 솜사탕, 장난감 코너나
무료로 진행되는 풍선아트를 손꼽아 기다린다.
참가하는 손님 입장에서는 가서 보고 먹고 사고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바자회를 주최하는 자치회나 학부모회에서는 3,4개월 전부터 차근차근 치밀하게 준비한다.
올해는 둘째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작년에 이어 다시 바자회 임원을 맡았는데
1학기에 이미 주먹밥, 팝콘, 빙수 등은 미리 신청받아
식권을 배포하는 작업을 마쳤다.
미리 구입한 이 식권만 있으면 아이들이 행사 때, 스스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고
주문받은 인원수에 맞춰 음식을 준비할 수 있으니,
불필요한 낭비를 막는 장점이 있다.
각 가정에서 기증받은 중고품 코너.
아래쪽에 우리집에서 낸 알파벳 나무 장난감도 전시되어 있네!
10년 가까이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건데, 아직 상태가 좋아서 버리질 못하고
집에서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여기에 이렇게 내놓고 보니 또 새롭다.
이 코너 담당 엄마가 3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내놓았는데 금방 팔렸단다.
우리집에선 더 이상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겐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이 되는 것.
이런 게 바자회만의 매력 아닐까.
이날, 중고책과 장난감 코너에서만 얻은 수익이 한국돈으론 60만원 정도였는데
홈메이드 코너나 식품 코너를 모두 합치면 3백만원 정도의 수익은 거뜬히 넘긴다고 한다.
엄마들의 협조와 자원봉사만으로 얻어진 수익이지만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다.
몇몇 임원들에 그치지 않고 대다수 부모들의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있기에
유치원 경영진과 학부모회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일하는 엄마들도 준비하는 과정에는 자주 참석할 수 없지만
행사 당일인 주말 하루만이라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찾아서 한다.
아이 친구 엄마 중에 은행에서 근무하는 엄마가 있는데
이날 회계를 도맡아 주어 얼마나 든든했는지^^
일반 가게에서는 비싼 값으로밖에 살 수 없는 새 물건을 반값보다 더 싸게
구할 수 있는 것도 1년에 한번 있는 바자회이기에 가능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가면을 장난감 담당 엄마들이
도매시장에 가서 상자로 아주 싸게 구매해오는 덕분에, 부담없이 살 수 있다.
유치원 마당에는 이런 캐릭터 가면을 쓴 아이들이 떼를 지어 놀며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준비하는 어른들은 힘들지만, 이날만큼은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축제처럼 마음껏 즐긴다.
평소의 정해진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유치원 마당에서 부담없이 먹고 마시고 물건을 사고 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좀 더 자주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아이가 다닌 유치원 바자회만 6년째인 나는 베테랑답게
올해도 한 살림 장만해왔다. 처음부터 사지않고 바자회가 끝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액세일이나 전품목 100원!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눈여겨 보았던 물건을 고른다.
대부분 중고품이 아니라 아직 한번도 쓰지 않은 새 물건들이었는데
경품이나 명절선물로 받아 채 쓰지 못한 것들이리라.
거의 공짜로 얻은 에코백들, 냄비받침, 맥주잔, 새 식기, 무릎담요 등.
예전엔 싸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사는 바람에, 집에 와서 보면 후회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욕심이 조금 나더라도 꼭 필요한 물건만 가져오는 요령이 이젠 생긴 것 같다.
벌써, 5,6년은 된 것 같은데 중고품으로 산 이 미피 시계도 겨우 몇 천 원이었다.
귀여워 맘에 들긴 하지만 살까말까 무척 망설였는데
오래 써도 지겹지 않고 유용하게 잘 쓰고 있어
그때 안 샀으면 어쩔 뻔했나, 볼 때마다 만족스러운 물건이다.
이렇게 우리집에 맞는 물건을 발견하는 안목도 바자회에 자주 참석하면서
조금씩 늘게 되어, 고르는 데도 점점 여유가 생긴다.
주최하는 입장이 되어, 때론 참가해서 즐기는 손님이 되어
해마다 경험하는 바자회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각 가정에서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이었던 물건들이 한 곳에 모여
사람들의 손과 노동을 거쳐 재탄생해서 귀한 돈으로 모인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큰아이는 동네 자치회에서 있었던 행사에서
그동안 참가해 즐기기만 하던 걸 벗어나, 가게 한 코너에서 어른 몫만큼의 일을 해냈다.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악세사리 장난감 코너였는데
언니가 물건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머리나 옷에 악세사리를 연출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니, 가게 앞에 어린 여자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설 만큼 인기가 많았다.
어른들에겐 사실 싸구려 장난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이지만
아이들에겐 그 어떤 보석보다 이쁘고 반짝여 보이는 법이다.
딸아이가 도운 악세사리 코너는 일찌감치 '완판'되어
동네 엄마들의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아이도 그냥 놀이보다, 작은 돈이긴 하지만 현금이 오고 가는 일이다 보니
진짜 사회 일을 해보는 긴장감같은 걸 경험하는 기회가 됐는지 뿌듯해 했다.
우리 아이뿐 아니라 초등 3,4학년을 넘어가면 이런 마을 행사를 어른들과 함께
돕는 아이들이 꽤 된다. 남자 아이들은 힘쓰는 일을 특히 잘한다.^^
이번에 느낀 거지만, 걷거나 자전거를 조금만 타면 찾아갈 수 있는
마을, 유치원, 학교 바자회는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올인하는 아이들의 주말 시간을
이렇게 다양한 생활문화를 경험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가족끼리 푼돈이 든 지갑만 들고 나가도 간단하게 점심도 해결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아이들도 동네 친구들 만나 실컷 놀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집 아이들은 비교적 게임이나 스마트폰을 가까이할 기회가 적긴 하지만,
심심하다 싶으면 각종 동영상이나 인터넷을 보여달라 조르는 일이 많다.
보고 즐기는 것을 적당히 허용하는 편이지만, 약속한 시간에 그만두는 일이
늘 어렵고 그것때문에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게 정말 지겹다.
멀리가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익숙한 동네에서
이런 바자회가 가을동안 거의 매주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기계가 아닌 오직 사람들의 힘으로 긴 시간에 걸쳐,
정성들여 만든 문화 아닌가.
남편은 어제 있었던 유치원 바자회를 보더니, 정말 엄마들의 힘과 노고에
할 말을 잊은 표정이었다. 시나 구에서 해도 많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이렇게 큰 규모의 행사를 오직 엄마들의 힘으로 꾸릴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라 했다.
직접 참여하고 있는 나도, 늘 놀랍다.
이 많은 일을 정말 엄마인 우리들이 다 해낸 걸까.
다 끝내고 나니, 하루 지난 지금까지도 온 몸이 뻐근하고 정신이 멍-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그 대신, 동네살이의 근육은 해마다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다.
동네 어른들의 이런 힘들로
아이들의 삶이 조금은 더 풍성해 졌으리라 생각하면 뿌듯하다.
아! 이제 내가 맡은 일은 다 끝났으니,
다음 주말부턴 다른 바자회에 가서 열심히 즐기고 싶다.
하늘도 공기도 맑고 푸른 이 가을,
아이들과 함께
동네마다 바자회를 열어보자.
너무 넘치는 이 과잉의 시대에,
불필요한 일상의 짐을 더 늘이지 않도록, 헛되게 버려지지 않도록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