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사진 자료 <서경신 기자 raoul@hani.co.kr>
요즘 일주일에 두어 번은 앞 이야기에 등장한 그 한국인 지인 댁에 들르고 있다. 아이 장난감을 한가득 가지고 그 댁에 들어가 단 몇 시간이라도 머물며 일손을 돕고 있는데, 케이티가 워낙 밖에 나가 노는 걸 좋아해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주 가게 되는 건 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다. 모르는 사람을 몇 주씩 들여다 산후조리 하는 걸 꺼려하던 이 언니에게 너무도 발랄(발칙?)하게 "남편이랑 둘이 해도 할 만해요!" 라며 부부끼리 산후조리를 적극 추천한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변명을 좀 하자면, 사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건도 하나 붙였더랬다. "물론 저희 때는 마침 방학이었고, 저희 남편은 원래 알아서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였지만." 이라고. 하지만 임신 후기, 아이 낳을 일만으로도 벅찼을 이 언니에게 그 조건은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남편은 많은 부분에서 살림에 제법 능숙한 사람이다. 그는 시골 농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세탁기, 청소기 같은 (이제는 기본 중의 기본인) 문명의 이기 없이도 집안일을 다 해낸다. 사실 나는 그리 풍족하게 살진 못했어도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손빨래가 익숙하지 않은데, 남편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자취를 하며 한 겨울 꽁꽁 언 물을 녹여가며 손빨래를 해야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전까지 속옷이나 양말 빨래를 각자 알아서 하는 아주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살림 형태를 유지했다. 아파트 공용 세탁기로 세탁하는 건 1주일에 한 번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나오는 소소한 빨랫감은 슥슥 비벼빨아 그날 그날 널어야 일주일간의 속옷/양말 갯수를 맞춰낼 수 있었다. (남들은 결혼하면 당연한 듯 남편 속옷 빨래까지 같이 하게 되던데, 나는 이게 웬 복인지!)
자취 경력이 오래 되어 웬만한 식사는 혼자서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인 것도 내 남편의 특이한 점이다. 결혼 후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앞에서 칼질하고 라면 물 맞추는 것마저도 부끄러운 수준의 요리 실력 때문에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집에서 자장면과 짬뽕도 만들어 내놓는 사람이며(비록 면은 마트에서 산 거지만), 냉장고 속 남은 재료를 보고 오늘 저녁 메뉴를 단 몇 초안에 생각해 내 뚝딱 만들 수 있는 경지. 그래서 결혼 후 내가 요리와 칼질에 익숙해질 때까지 소소한 밑반찬은 주로 내가 해 놓고 주요리는 남편이 하곤 했다.
산후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빨래와 요리 아닐까?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산모는 아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먹이고 갈고 재우고 달래는 것만으로도 손목이 나가기 십상이라는데. 거기에 매일 나오는 아이 빨래를 그것도 손빨래로 해야 하는 처지라면? 그리고 애 먹이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나 먹을 시간이 어디 있으며 남편 먹을 밥/반찬 만들 시간이 어디있을까. 결국 우리가 케이티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기간엔 그야말로 남편이 산후도우미 역할을 했다. 매일 삼시 세끼를 때 맞춰 요리해서 내 앞에 들이 밀며 그는 '너는 애 먹여야 되니까 네가 더 잘 먹어야 한다, 그러니 내 할 일은 너를 먹이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매일 밤 기저귀 십 수 장, 아이 옷 서너 벌을 발로 밟고 손으로 비벼 빨았다.
마침 학교는 방학 기간이었지만, 대학원생에게 원래 방학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는 3주간의 그 짧은 방학을 나와 산후조리를 하는 데 몽땅 바쳐야 했다. 3일 넘게 신생아집중치료실에 있다 나오는 바람에 엄마 젖을 물지 못하게 된 케이티에게 모유 한방울이라도 더 먹이려고 2~3시간에 한 번씩 유축을 해야 하던 때였다.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돌아가던 그 때, 남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와 나를 위해 살았다. 새벽에도 시간 맞춰 유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 수유도 남편과 번갈아 가며 했다. 2시에 내가 먹이고 기저귀 갈아 재우고 나면 5시엔 남편이 나와 유축해 둔 모유를 먹이고 기저귀 갈아 재웠다. 그렇게 3*7일을 지내고, 우리는 서서히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내 남편을, 우리를 자랑하기 위해 쓴 게 아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들이 이렇게 산후조리에 직접 참여하면 이후 육아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단,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정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우리가 돈 안 들이고, 다른 사람 부리지 않고 우리끼리 산후조리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의 직업이 '학생', 게다가 '방학 중인 학생' 이었기 때문이다. 둘이서 산후조리 하는 데 가장 필요한 물리적인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직업에 상관없이 세상 모든 아빠들에게 아이가 태어난 후 최소 3주 동안 똑같이 이런 기회를 주면 어떨까? 출산휴가가 있어도 업무를 놓을 수가 없어서, 혹은 눈치 보여서 쓸 수 없는 아빠들의 등을 직장이, 사회가, 가족이 좀 떠밀어 주면 어떨까? 단, 산후조리원을 이용하지 않고 둘이서만 한다는 걸 약속으로 걸고 말이다. 편안한 집에서 가족끼리 지내며 탄생의 기쁨과 함께한다는 것의 뿌듯함, 서로의 노고를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감사하며 애틋해지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함께 자신의 생애 처음 3주를 돌봐주었다는 얘기를 두고 두고 듣고 자란 아이는 또 어떨까? '제왕절개 중 산모가 죽어도 책임 없다'는 수술 동의서에 사인만 하고 다시 일터로 부리나케 달려가야 했다던, 평생 육아며 자식 교육에는 관심 둘 틈도 여력도 없었던 아버지 세대를 보고 자란 우리와는 좀 다른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조건, '집안일 잘 하는 남편' 역시 우리의 인식 전환, 남자들의 실천과 더불어 회사와 사회와 가족의 남편 등 떠밀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산후조리를 위해 출산휴가를 신청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모식 조리 과정 이수'를 내걸고 모든 아빠들이 기본 미역국+3첩 반상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그래서 산후조리 기간 동안 아내들이 맛은 조금 없어도 정성 가득한 남편표 밥상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떨까? 산모교육 프로그램에 남자들을 위한 요리 특강이나 살림법 특강을 넣어보는 건? 하다못해 세탁기 돌리는 법이라든지 젖병 삶는 법 같은거라도 다같이 한 번 배워보는 건 어떨까?
부양 가족이 있는 직장 생활자에게 가정은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마지막 보루다. 이 최후의 보루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직장생활을 잘 하고 승진을 하고 돈을 많이 번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아 왔다. 결국엔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해버린,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아내가 어떻게 아이들을 보살펴 왔는지 영영 모른채 살아가는 아버지들을. 우리는 그동안 이런 아버지를 탓해왔지만, 우리 또한 우리 남편들을 다시 그런 아버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진 않은가? 요즘은 일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왜 똑같이 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매 순간 '내가 직장을 관두고 애들을 봐야 하는 거 아닐까' 하며 괴로워해야 할까? 결국 우리는 산후조리부터 시작해서 육아와 살림에 관한 도움을 친정어머니/시어머니/조리원 직원/산후도우미/보육기관 교사 등 다른 '여성'들로부터 받음으로써 다시금 가사/육아를 위해 여성의 노동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출발점이 바로 '부부끼리 산후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