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소비'에 이어

'착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자주 듣게 된다.

여행자 뿐 아니라 여행지에 거주하는 현지인과 자연환경까지 생각하는

이 '공정 여행'(Fair Travel)에 대한 관심은, 휴가철이 지난 관광지의 부작용이나

지나치게 상업화된 관광상품 문화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바다 건너 사는 내가 보기에,

요즘 한국은 캠프제주가 대세인 것 같다.

관광지 중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감하며

한 곳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여행 문화가 반갑기도 하지만,

캠프와 제주 열풍으로 인해 또 소중한 곳들이 몸살을 앓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잔소리를 들을 줄 알면서도 이런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행을 무척, 많이 좋아하지만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는 관광지, 정말 괜찮은 곳이지만 '착한 여행'을 무시한 관광객들과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현지 관광업자들의 바가지 요금에 나쁜 인상만 가지게 된 경험도

참 많이 했다. 유명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필요이상으로 비용을 들이고,

불쾌한 경험까지 인내하며 할 필요가 있을까?

이왕이면, 아름답고 의미있는 곳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즐거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도록, 방문하는 사람도 현지인들도 함께 지켜나갈 순 없을까?


해마다 여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부산 해운대 바다 근처에서 살았던 나는

휴가철이 지난 뒤, 백사장에 버려진 끔찍할 만큼 많은 쓰레기를 보는 것이 너무너무 괴로웠다.

왜 이렇게밖에 이용할 수 없을까?

현지인들도  타지의 여행객들을 왜 돈을 버는 대상으로만 대하는 걸까?

그 수많은 쓰레기를 치우느라 드는 비용은 또 얼마며,

여름 한철 동안의 오염을 회복하느라 자연은 또 얼마나 몸살을 앓을까..


이런 불만과 의문을 여전히 안고 살지만,

여행이 주는 설레임과 환상 역시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가서 좋았다 하면 나도 한번 가보고 싶고,

요즘 뜨는 곳이다 하면 나도 모르게 검색을 시작하며 로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살면서,

여행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사실 먼 곳이나 유명한 곳에서만 여행의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런데, 집앞의 놀이터나 몇 분거리에 있는 친구네집에서도

아이들은 평생 기억에 남을만큼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마치, 평범한 일상에 마법을 거는 능력을 가진 듯

눈앞의 시간과 공간을 반짝반짝 빛나는 여행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다.

함께 있어 너무 좋은 친구나 또래,

그리고 안심하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불과 얼마 전에도 이런 순간을 경험했다.

아빠는 연이어 야근을 하느라 며칠 집에 오지도 못하고

친구들은 모두 휴가를 떠나, 놀러오는 사람도 놀러갈 곳도 없어

두 아이가 심심하다, 외롭다, 노래를 부르던 참이었다.

이 녀석들아! 엄마는 더 외롭다!! 소리를 꽥 지르며 저녁은 또 뭘 해서 먹나

한숨을 쉬던 차에 문자가 울렸다.

"갑자기 미안~ 이제 퇴근할 건데, 애들 데리고 놀러가도 돼?

 과일이랑 케잌은 내가 책임질께^^"

나와 제일 가깝게 지내는 생협 친구였다. 아이들도 동갑이라 서로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이..

직장맘인 그녀와는 두 집 남편들이 야근하는 일이 많아, 이렇게 종종 저녁에 만나 놀곤 하는데


아! 타이밍 한번 대박이다!

이럴 때 와주면 애들한테도 좋고, 어른한테도 좋고.

문자 내용을 전해들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함께 놀 판을 만드느라 분주해졌다.

아이들은 이미 집안에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시나마 어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어른들의 언어가 그리워지는 법..


DSCN3390.JPG


아이들이 흥분해서 친구가 오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부리나케 카레를 만들었다.

보글보글 끓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울 때쯤, 벨이 울렸다.

와~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네가 들어서고, 거실에 상을 펴고 함께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큰아이가 미리 세팅해둔 CD플레이어에선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OST가 울려퍼졌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 천정의 전등불 모두가

캠프장에서 보내는 한여름밤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DSCN3331.JPG

친구 엄마가 사온 여러 종류의 조각케잌들.
케잌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새삼스레 놀랍다.
탄수화물에 당분까지 듬뿍 섭취한 아이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또래끼리 짝을 지어 큰애들은 방에서, 작은애들은 엄마 옆에서 놀이여행(?)을 떠났다.
어른만의 시공간을 확보한 엄마들은, 나이트커피와 함께 하루의 피로를 달랬다.
친하긴 했지만 너무 깊은 얘기는 아직 해 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 얘기를 하다가, 그만 각자의 어린 시절 상처가 됐던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저녁이 깊은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무더웠던 하루가 너무 고단해서 그랬을까
한 두 시간 사이에 관계의 진도를 너무 빼버린 듯^^

4,5시간 정도에 불과한 시간동안
아이도 어른도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문득 떠올랐다. 캠프가 아니라도, 제주가 아니라도, 이렇게 놀면 안되나??

멀리까지 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도 일상 속에서 여행같은 순간을 만드는 일.
돈 없이는 여행도 어렵다는 세상, 그 안에서도
살만한 방법들을 우리끼리 잘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의미의 이런 '착한 여행'의 비결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배워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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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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