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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 중간에서 언니와 놀며 책 읽는 흉내를 내는 16개월 이룸)



요즘 부모들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일에 정성이다.

어른들 책은 몇 년째 불황인데 아동 도서는 늘 호황이란 기사를 보면,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책

사주는 일에는 가벼워진 지갑도 기꺼이 열고 마는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을 짐작할 수 있다.

책 많이 사주고, 많이 읽어 주는 것 물론 좋은 일이다. 형편이 된다면 좋은 책을 많이 구해주는 게

나쁠 리 없고 시간만 된다면 단 몇 권이라도 부모가 직접 읽어주는 게 아이에겐 더 좋을 것이다.

거기에 어린 시절 독서 이력이 나중에 대학 입시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사방에서 들썩여주니

부모가 되어서  아이의 독서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 애들 데리고 가보면 아이들 끼고 앉아 열심히 책 읽어주는 엄마들, 아빠들 정말 많이

만난다.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은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도서관을 부지런히 찾는다.



나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 꼬박 마을 도서관을 찾는다.

윤정이의 발레 수업이 도서관이 있는 자치센터 2층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이를 교실에

넣어주고 40분간 이룸이, 필규와 함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다.

필규야 아홉살이니 제가 좋아하는 책 찾아서 읽고 있지만 16개월인 이룸이는 책 빼는 행위가 재미있을

뿐 아직 엄마가 읽어주는 책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나이가 아니라서 그냥 책 방에서 노는 게 고작이다.



이렇게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자주 다니다 보니 다양한 부모들을 만나게 된다.

어찌나 실감나게 책을 잘 읽어주는지 내 아이도 그 쪽으로 보내어 듣고 싶게 하는 엄마도 있는가 하면

아이가 책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억지로 끌어당겨가며 읽어 주느라 진땀 빼고 고생하는 엄마도 본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정말 안타까운 엄마를 만났다.

그녀의 곁에는 두 돌쯤 지난 아이가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품 안에는 윤정이 또래로 보이는

4~5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수북히 책을 쌓아놓고 아이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놀란 것은 그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속도였다. 마치 폭포수처럼 빠르게 글들을

입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읽고 있는 책은 그 아이 수준에서 읽기에는 글이 너무 많은 외국 동화였다.

속도가 빠르다보니 음조의 변화도 별로 없고 의성어나 의태어가 생생하게 전달될 리가 없다.

시종 밋밋한 목소리로 오직 빠른 시간 안에 이 책을 다 읽어주겠다는 열의만 가득해 보였다.

아이는 품안에 안겨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생기가 없었다.

지친 듯, 졸린 듯 맥이 풀린 눈빛이었다.

숨 쉴틈 없이 정신없이 <미녀와 야수> 책을 읽어주자마자 그 엄마는 “재미있었지? 이번엔 <빨간 두건 아가씨>야.”

하며 다시 책 한 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시 폭포수 같이 글들이 입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아아... 내가 다 숨이 막혔다.



그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어린 동생이 있으니 평소 큰 아이에게 마음놓고 책 읽어 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이룸이 때문에 윤정이가 읽어달라고 가져오는 책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잠들었으니 이때다 싶었을 것이다. 깨어나기 전에 한 권이라도 더 읽어주려고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애를 썼으리라. 많이 읽어주면 좋다고 하니까 한 권이라도 더 읽어줘야지

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정말 답답했다.



독서는 양이 아니다.



독서가 중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많이 읽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에게 독서의 즐거움에 눈뜨게 하고 평생 책을 벗삼아

살 수 있는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 첫 단추가 부모가 읽어주는 한 권의 책에서부터 시작한다.

집에 책이 많아도 아이가 유난히 애착을 보이는 책들이 있다. 그 책부터 시작해서 엄마나 아빠가

무릎에 앉혀 놓고 천천히 재미나게 읽어주다보면 아이는 부모와 책 읽는 시간이 좋아진다.

다 읽고나면 많은 아이들이 '아 재미있다. 또 읽어주세요' 한다. 그게 아이다.

저한테 재미있으면 다섯번도 좋고, 열번도 좋다. 어제도 읽은 책을 오늘도 또 가져오는 게 아이다.

100권의 책을 읽은 아이보다 한 권의 책을 백번 읽은 아이가 더 책과 가까와 지는 법이다.

책의 모든 것들을 낱낱이 맛보고 느끼고 제 것으로 흡수하려면 한권의 책이 나달나달 해 질때까지

읽게 된다. 그러 과정에서 정말 책 읽기의 참 맛을 알게 된다.



독서는 소통이자 교감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무수하게 많은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어른이 “호랑이가 성큼 성큼 걸어 왔어요” 하면

아이는 “'성큼 성큼이 어떻게 걷는 거야?” 물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른은 몸을 움직여 성큼 성큼 걷는 것을 흉내낼 수 있다. 아이는 즐겁게 웃으며

그 모습을 마음에 담는다. 이런 게 책 읽기다. 한 구절에 빠져서 한참을 웃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게

바로 독서의 즐거움이다. 다음 장을 쉽게 넘어가지 못하면 어떤가. 그 장에서 같이 누릴 게 많으면

그게 더 좋은 일이다. 아이는 그림을 궁금해 할 수도 있고, 표현이 궁금할 수도 있고

역사적 사실이나, 제 상상 속에서 연관되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 정말이지 책 한 권으로

우리는 몇 날 며칠이고 풍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글과 글 사이에 충분한 여백을 둬서 아이가 이야기와 상상력 속에 빠지게 하자. 가끔은 아이에게 물어도 보고

아이의 생각도 들어보자. 산에 오르는 것처럼 쉬기도 하고, 숲 사이를 헤매기도 하고, 그러다가

길을 잃어도 상관없는 게 독서다.

어린 날의 책 읽기는 충분히 즐거워야 한다.  절대 의무나 공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책이 좋아지면 그 다음엔 저절로 놔두어도 스스로 책을 찾는 아이가 된다. 책을 안 읽고는 못배기는 아이가 된다.

그렇게 이끄는 게 부모의 역할이지 책의 즐거움을 알기도 전에 너무 많은 양의 독서를 퍼부어서

책에 질리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엄마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애쓰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책 읽어주는 것 절대 쉬운 일 아니다.

나도 서너 권만 연속적으로 읽으면 목이 잠긴다. 그것을 한 번에 십수권씩 해내려면 보통 열의

갖고는 안된다. 어린 동생이 있어서 많이 읽어줄 수 없다면 동생이 잠들었을 때 시간을 내면 된다.

나도 그렇게 한다. 책을 많이 읽어주지는 못하지만 몇 권이라도 정말 재미나게 읽는다. 아쉬워서

더 재미나게 그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양보다 더 중요한 건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아이와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나누고 느끼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윤정이랑 <청개구리 이야기>를 읽다가

‘엄마가 '개굴 개굴'이라고 하면

청개구리는 '굴개 굴개' 거꾸로 말 했어요. 엄마는 거꾸로 말하는 청개구리 때문에 속이 상했어요.’

읽어주었더니 윤정이가

“그런데... 굴개 굴개라고 해도 되는데... 거꾸로 해도 괜찮은데요? 엄마. 화를 내지 않으면

좋겠어요” 하는 거다.

“아... 그렇네. 다른 청개구리처럼 ‘개굴 개굴’ 하지 않고 ‘굴개 굴개’ 해도 괜찮은 거구나.

거꾸로 한다고 화를 내지 않았으면 엄마 청개구리도 속상해서 죽지는 않았을텐데...

엄마는 윤정이가 거꾸로 해도 화 내지 않을께.”

이런 얘기를 했다.



책을 읽으며 아이는 제 생각을 키운다. 그 생각이 싹 틀 여유를 주고 마음을 기울여주면

아이는 책 속에 저만의 길을 만들며 건강하게 걸어간다.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애써서 졸음을 참아가며 수많은 책들을 읽어주느라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어린 날의 독서는 우선 즐거워야 한다.

볕 좋은 5월의 놀이터로 뛰어 나가고 싶은 아이를 억지로 붙잡아 앉히고 책을 읽어주고 있다면

차라리 책을 치우자. 마음껏 바람 속을 뛰며 웃는 것이 아이의 몸과 마음을 더 살찌우게 한다.

책은 종이 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바람 속에, 공기 속에, 갓 피어난 잎들과 꽃들, 세상 어디에도

있다. 더 큰 책을 읽어줄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아이와 어디에 있든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 속을 거닐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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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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