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나쁜 길에 빠지지 않는다
얼마 전 자신의 꿈을 억누르고 ‘판·검사’로의 진로를 강요하는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을 죽인 중학생의 패륜범죄로 떠들썩했다. 천하의 나쁜 놈이라는 비난에서 평소 얌전했다는 아이가 오죽했으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겠느냐는 동정론까지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그 충격적인 사건에 관해 의견을 한마디씩 내놓은 것 같다.
우선 나의 의견부터 거칠게 말하자면 ‘오죽했으면’에 한 표다. 물론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언명령 못지 않게 또 하나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있다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모두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모두 바르게 자라난다.
사실 이건 내 의견 만은 아니다. 오래 전 친구와 비슷한 패륜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어떻게 그렇게 키워준 엄마를 죽일 수 있지?”라고 ‘나쁜놈’론을 펼치자 친구가 한마디 했다. “난 모든 패륜 사건에는 말해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해.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를 죽이고 싶게끔 만드는 건 부모야.” 그때는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갈수록 되새기게 되는 말이었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백퍼센트 친구의 말에 공감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놀라운 점 중 하나는 도무지 통제 불능에 자신이 하는 행동(그렇게 가면 바로 고꾸라지지!) 을 전혀 예상도 못하는 1차원적인 아기가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성을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귀찮거나 성가시게 해도 그게 사랑의 표현이면 아이는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렇게 좋아하는 리모콘이나 핸드폰 따위의 장난감을 못잡게 꼭 붙잡고 얼굴이 터져라 뽀뽀를 계속하면 아이는 울지 않고 좋아하거나 가만히 있는다.
갓난 아기일 때부터도 애정표현에 대해서는 아무리 성가셔도 좋아하더니 요새는 꾸짖음도 알게 돼서 “부엌엔 오지 말랬지?” “그거 만지지 말란 말이야”라고 일부러 언성을 높이고 야단치면 삐죽대다가 울음보가 터진다. 그리고 어떨 때는 조그만 아이가 풀이 죽기까지 한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이것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꾸짖음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지금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과 구박받는다(야단 맞는다)는 것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인지를 6,7개월이 지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신생아를 상대로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있으면 처음에는 아이가 엄마를 웃게 하기 위해 갖는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이도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고 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건 본능이고 그 사랑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아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 애정에 기반한 어떤 감정, 그러니까 연민이나 동정같은 것도 전혀 없는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가 되는 걸게다.
요새 아이는 잠이 들 때 꼭 엄마에게 다리를 기대거나 배를 만지거나 하면서 잠이 든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해방이라는 생각에 나는 나는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얼른 방에서 나온다. 그러면 좀 있다가 꼭 깨서 문까지 기어와 문을 두드리며 ‘어, 어’ 엄마를 부른다. 이때 엄마가 빨리 가지 않으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갈 때마다 내가 만약 지금 가지 않는다면, 자다가 엄마를 찾을 때 엄마가 오지 않는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마 아이는 목이 터져라 울다가 결국 포기하고 기운 없이 스스로 잠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 잠은 안정되고 평온한 마음에 드는 잠은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실업계 교사인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아무래도 인문계 고등학교보다는 가출사건도 많아서 한 번은 작정을 하고 가출 학생을 찾아다니면서 아이의 집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중 누구도 아이의 가출을 근심하는 부모가 없었다고, 심지어 찾아도 집에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 부모도 꽤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교사인 지인한테 들은 이야기는 문제아일수록 조금 신경을 써주면 금방 선생님을 몹시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학생이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니 다른 학생한테도 신경을 쓰면 그때부터 선생님에게 쌍욕을 하면서 분노한단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사랑받는 걸 배우지 못한 탓이다.
나의 일방적인 부모책임론에 나는 사랑을 준다고 애썼는데 엇나갔다고 항변할 부모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주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썼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올바른’ 사랑을 줬는지 되새겨봐야할 일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내 새끼를 예뻐하고 사랑을 줘도 남의 자식 밀어젖히고 우리 아이 그 자리에 앉히는 사랑이라면 아이가 그런 부모로부터 어떤 걸 배울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지난주부터 본의 아니게 진지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연속으로 쓰고 있다. 아이를 키울수록 행복한 만큼 어깨도 무거워져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어떤 게 올바른 사랑일까 등등. 결국 아이를 키운다는 건 무엇을 입힐까, 어떤 걸 가르칠까 라는 고민보다 훨씬 무겁고 큰 고민과 철학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