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월은 큰아이가 태어난 달이다.
아이를 낳기 전 나에게 6월은 그저 봄도 여름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일 뿐이었다.
가족, 친척을 비롯해 친구들 중에서도 6월생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고
어릴 때는 늘 학교에 다니던 시기라 기억에 남는 추억도 별로 없다.
그런데 첫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6월은 나에게 가장 특별한 달이 되었고,
이 계절이 주는 느낌과 변화를 아주 섬세하게 감지하며 살게 되었다.
수국이란 꽃을 알게 된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수국은 초여름에 가장 아름답게 피는데,
내가 사는 일본은 주변에서 수국을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6월에 집밖을 나가면 길가나 주택 담장, 가게 앞 화분 등
몇 걸음 간격으로 흰색부터 붉은 색, 푸른 색 다양한 색깔의 수국을 구경할 수 있다.
6월이 끝나가기가 무섭게 금방 시들어 버리는 수국의 아름다움을 놓치기 싫어
큰아이가 첫 생일을 맞았을 때, 수국 꽃밭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부터 아이가 12살이 된 지금까지,
매년 생일 때마다 수국과 함께 생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돌 기념으로 처음 사진을 찍었을 땐, 아이가 아직 걷지도 못하던 때라
유모차에 앉혀서 찍었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넘겨보면
입에 손가락을 물고는 카메라를 쳐다보던 어린 아가가
다음해엔 우산을 쓰고 수국 옆에 서 있고,
그 다음 해엔 자전거를 탄 채 서 있고,
또 그 다음 해엔 까불거리며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해서 올해 생일까지 수국과 찍은 사진이 이제 10장이 넘게 되니
뭔가 감개무량하다.
해마다 같은 날에 수국 앞에서 찍은 아이의 사진을 보며
나는 아이의 성장과 변화와 함께
엄마인 나 자신의 내면이 참 많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곤 했다.
지난 12년간을 돌아보니, 생일을 맞아 아름다운 수국 앞에 선 딸아이를
보며 기쁘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걱정과 근심도 참 많았던 것 같다.
3살이 되면 부끄러움을 좀 덜 타야 할텐데 ..
5살이 되면 좀 더 씩씩해져야 할텐데..
7살이 되면 좀 더 똑똑해져야 할텐데..
9살이 되면 좀 더 자기 의견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야 할텐데..
10살이 되면 .. 11살이 되면 ..
좀 더, 좀 더 잘해야 할텐데..
생일과 함께 이제 1살 더 먹었으니,
지금까지 서툴고 모자랐던 것들에서 얼른 벗어나
아이가 빨리 변화하기를, 성장하기를,
겉으론 안 그런 척 하면서 나는 늘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속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더 즐겁게 더 기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이가 12살이 된 올해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라는 안도감과 충만감 같은게 있다.
이런 감정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건가 곰곰히 생각하던 차에
세월호 사고 후에 나온 한 어린이문학 계간지를 읽다가 그 답을 찾게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사람은
우월감, 자부심 같은 감정을 통해 즐거움을 맛본다.
하지만 안정된 인격과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건실함이 있다면,
우월감 없이도 남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이유없이 남을 시기하지 않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게 한껏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미진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다.
- 창비어린이 2014. 여름호 중에서 -
아! 나는 우리 아이가 정말 이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부족하더라도 당당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이 가진 것을 마냥 부러워하고 질투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장점을 자기 삶에 참고하며
남과 함께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무한 경쟁과 불안정하고 변화가 심한 사회,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데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이런 내면의 힘이 아닐까.
더 이쁘고 멋있었으면
더 실력을 갖췄으면
더 똑똑했으면
더 강했으면 ...
아이가 커갈수록 지금 안 되는 것,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
아닌 척 하면서도 엄마인 나의 속마음 속에서는 무섭게 자리잡고 있는 걸 자주 느낀다.
하지만, 세상이 이제 너무 위험하고 한치 앞을 예상치 못하게 된 탓일까.
그저 해마다 6월이 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는 수국을 볼 수 있는 자연이 건강하게 남아주기를,
그 곁에서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갈 때까지
기념사진을 찍으며 해마다 하는 이 소박한 생일 의식을
앞으로도 쭉 이어갈 수 있기를
그저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올해도 동네를 산책하다 소담스럽게 핀 수국 꽃 옆에서
아이의 생일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 젖먹이였던 아기는 어디 가고 이렇게 큰 아이가 내 눈 앞에 있다니!
본격적인 사춘기가 오면, 아마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때가 올 수도 있겠지..?
수국과 함께 찍는 이 생일 사진을
어쩔 수 없이 한 해 건너뛰기라도 할까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이런 마음도 결국엔 다 엄마 욕심일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