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람아, 유치원 가지 말고 엄마 따라 논에 갈래?”
여느 때처럼 이불에서 자는척하던 해람군, ‘논’이라는 말에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나는 초등학교 형, 누나들 모내기 도와주고 사진도 찍어야 해서 해람이랑 같이 놀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같이 갈테야?”
“그럼 나도 사진 찍으면 되지. 장난감 자동차도 가져가고!”
아이는 어느새 일어나 조그만 배낭에 제 사진기와 장난감을 찾아 넣는다.
“엄마, 루뻬(생물 관찰용 돋보기)도 챙겼어?”
깜박쟁이 엄마를 대신해서 준비물도 확인해주고.
유치원보다 논을 좋아하는 아이, 논에 가자는 말에 벌떡 일어나 스스로 가방까지 싸는 걸 보니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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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논’은 먼 시골 마을의 딴 세상 이야기였다. ‘쌀 나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벼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자라 쌀을 만들어 내는지 경험해보지 못했다. 농사와 관련한 ‘가을-황금빛 벌판’ 같은 관용적인 수식이 나는 늘 어색했다.
나보다 더 삭막한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자연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지도에 초록색으로 칠해진 ‘공원’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보기 좋게 잘 꾸며진 ‘공원’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레탄 고무가 깔린 산책로, 계절마다 새로 심는 일회용 꽃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흙을 밟아보자는 생각에서 텃밭 농사를 시작하고 농사 정보를 나누는 생협 소모임에 나가 보았다. 농사 ‘정보’를 얻으러 나간 모임에서 자연과 친해지고 노는 법을 배웠다. 애기똥풀의 노란 즙으로 손톱을 칠하고 냉이 꽃대를 손바닥 사이에 넣고 딸랑이처럼 흔들어 소리를 낸다! 자연을 그저 ‘배경’으로만 이해하던 나에게 흙과 풀, 들꽃, 열매, 벌레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논의 물웅덩이는 내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세상이었다. 물방개, 물땡땡이, 게아재비, 장구애비, 물벌레, 깔따구, 또아리물달팽이... 뜰채로 떠올린 진흙 속에 이렇게 조그맣고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니! 잠자리 애벌레가 논물에 살다가 물가로 나가 껍데기를 벗고 하늘로 날아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논에서 꼬물거리는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 지속 가능한 농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논살림 모임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마’들이다. 나처럼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게 해주려고 왔다가 논의 생태적 가치에 반해서 이를 알리고 지키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논에 가서 벼가 자라는 과정을 기록하고 논물과 논둑에 사는 생물을 관찰한다. 멀리 강원도 생산지에도 가지만 강동구에는 구에서 만든 체험 논이 두 군데 있어서 주로 이곳에서 만난다. 올해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논 학교를 열고 논 풍경과 논 생태계를 담은 사진첩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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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화요일, 논 학교 첫 수업으로 초등학생들과 모내기를 했다.
못줄을 따라 줄지어 서서 모를 심는데 아이들 서너 명 사이 사이에 어른들이 자리 잡았다. “OOO가 모를 참 예쁘게 잘 심는구나!” 하는 칭찬에 아이들 표정이 밝아진다. 가르쳐준 대로 정성스레 모를 심는 아이들의 손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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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심은 모가 자라 쌀이 된단 말이죠? 진짜 쌀이 열려요?”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보러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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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장화, 발이 푹푹 빠지는 것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아이들 모두 즐거워했다. 모내기 더 하고 싶다고, 더 놀면 안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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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끝내고 논에서 채집한 생물을 관찰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도룡뇽’이었다. 일 급수,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도룡뇽! 누군가 모내기를 하면서 도룡뇽을 잡았고, 논의 이름을 ‘도룡뇽 논’으로 바꾸자는 말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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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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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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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땡땡이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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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람이는 나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생물 채집을 도왔다.
“여기, 실잠자리 좀 찍어봐!”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고 뜰채로 물방개와 소금쟁이를 건져내는 숙련된 조교(?)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새끼 거미들을 들여다보고 도룡뇽을 만져보느라 가져간 장난감 자동차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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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김밥을 사 들고 텃밭에 갔다. 내가 일하는 동안 텃밭 보급소 앞에 앉아 김밥을 먹으라 했더니 해람이가 “나는 무당벌레 관찰할 거야.”라며 나를 따라온다. 당근 솎는 일을 시켰더니 조그만 당근을 뽑아들고 “아, 향기 좋다~”라며 미소를 짓는다. 언제부턴가 ‘밭에 안 갈거야!’를 외치는 아루, 멋 부리기 좋아해서 밭에 오면서도 장화 대신 아끼는 분홍 샌들을 신고 왔는데 어느새 내 곁으로 와 상추를 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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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선물! 내가 발견한 보물이야.” 해람이는 무언가, 보물을 잘 줍는다. 조그만 씨앗, 말라 비틀어진 열매, 반짝이는 돌멩이, 꼭 무언가를 주워 내 주머니 속에 넣는다.
“흙이 보물이지, 모든 게 흙에서 자라나잖아.”
아루는 제법 뭐를 아는 것처럼 말한다.
내겐 아이들의 이런 한 마디, 한 마디가 ‘보물’이다.

서울,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 살며 논에서, 밭에서 일하고 논다. 내 손으로 먹을거리를 지어 먹는다는 자긍심이 소비에 의존하는 불안한 삶에 작은 돌파구를 만든다. 무릎을 굽혀 가만히 들여다보면 꼼지락거리는 무수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풀, 벌레와 함께 아이들도 자란다.


PS
서울 시장 후보로 나선 몽(!)후보가 노들섬을 텃밭으로 ‘놀리고 있다’고 비판하며 자신이 시장이 되면 이곳을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겠다고 했단다.
모내기를 마치고 이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무척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났다. 텃밭과 체험 논을 두고 땅을 ‘놀린다’니! 그리고 그가 그리는 문화 공간이 관람차 같은 놀이시설을 짓는 것이라니!
텃밭과 체험 논은 도시에 살며 생태적 삶을 고민하고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한강 르네상스라는 허울로 난개발에 신음하던 노들섬, 노들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란 뜻이란다. 논의 생태적 가치는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습지로서의 기능에 있고 습지는 새들의 서식지임을 떠올려보면 노들섬이야말로 논과 잘 어울리는 곳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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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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