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랑네 아빠만큼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자상하진 못하지만
남편은 요즘 '슈퍼맨' 아빠들 속에 끼어도 될 만큼 육아에 능숙해졌다.
아니, 능숙해진 듯 보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두 아이를 키우며 나 나름대로 정리해본 남편 육아 스타일의 특징은,
만0-4세 시기의 하드코어적인 육아에는 쩔쩔매며 위기의 순간마다 도피를 일삼다가
아이의 많은 부분이 안정기에 들어서는 만5,6세 시기부터 "이뻐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스타일이다.
손이 많이 가고 밤잠을 설치며 밥도 편하게 못 먹던 두 아이의 아기 시절엔
뭐 하나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하는 게 없이 늘 마지막 몇 %는 나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어쩌다가 자기가 다 해야 할 때도 끙끙대며 힘들어하고 귀찮아할 때가 많았다.
그랬던 그가, 둘째가 어느 정도 크고나니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싶은가 보다.
화장실도 제발로 가지, 밥도 혼자 잘 먹겠다, 말도 조잘조잘 재밌게 하는 나이다 보니,
외출할 때 부담이 적은 것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빠가 함께 있는 시간을 전보다 즐겨서인지 여태까지 엄마 의존도가 강했던 둘째는
예전같으면, 아빠와 같이 잠자리에 든 뒤에도 꼭 다시 엄마를 찾곤 했는데
요즘에는 아빠와 같이 자는 걸 더 좋아한다.
자기 전엔 그림책을 가져가 이불 속에서 함께 보다 잠드는 모양인데,
아빠가 읽어준 책 덕분에 둘째는 요즘 작은 성장 하나를 이루어냈다.
바로 배변훈련의 마지막 관문,
응가 후에 스스로 뒤를 닦는 게 가능해진 거다.
아빠랑 며칠동안 배변훈련 관련 그림책을 자기전에 열심히 보더니,
화장실 갈 때마다 혼자 해보고 싶어해서 몇 번 연습하고는
지금까지 제법 잘 하고 있다.
아이가 혼자 하는 걸 처음 지켜봤을 때, 두세 번 휴지로 닦더니
"더 이상 휴지에 묻지않으면 끝~~" 하는 책 속의 대사를 신나게 외치며 즐거워했다.
뒤를 닦을 때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질 수 있으니 한쪽 손으로 벽 같은 데를
잡고 닦으면 안정감있게 할 수 있다는, 디테일한 조언까지 아빠가 해 준 모양이다.
아빠 육아의 성과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는데, 이외의 이런 결과에 조금 놀라웠고
엄마인 나는 숙제 하나가 줄어든 것 같아 홀가분하다.
진작에 이렇게 좀 하지!!
벌써 아빠 경력 12년째건만.
1만 시간의 법칙도 우리 남편만큼은 비켜가는 건지,
아이들과 함께 하다 위기의 순간들이 닥치면 여전히 당황하고 허둥대며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돼?' 하는 표정이다.
아이사랑이 이벤트가 다는 아니라는데도, 남편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려면
어딘가 근사하고 멋진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도 자주 하는 것 같다.
그저 동네 한바퀴만 돌아도 어른이 유쾌하고 즐거워하면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아직 그는 모르는 걸까. 20분이면 휙 걷다 올 길을, 수다도 떨고 장난도 치며
놀이터를 만나면 잠깐 놀기도 하고, 길가에 핀 꽃들이나 개미도 구경하고, 새로 생긴 가게가
있으면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빵집을 만나면 각자 좋아하는 빵 하나씩 골라 먹고 집으로 돌아오기.
단조로운 20분 거리를, 2시간의 새로운 발견과 행복으로 채울 수 있는 건
작은 아이들이 함께 있기에 가능하단 것. 그리고 그 시기가 매우 한정되어있다는 걸
남편은 알고 있을까.
아빠 육아 예능프로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빠들이 육아가 의미있는 일이라는 걸
스스로 깨닫는 순간들을 잘 포착해서 보여준다는 사실만큼은 무척 다행스럽다.
엄마 대신 등교길 교통안전 지도에 나선 아빠가, 신호등 저 쪽에서 가방을 메고 뛰어오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한 순간 '어느새 저렇게 컸나..' 싶어 뭉클함을 느꼈다는 것처럼
좌충우돌하는 일상속에서도 아이들의 작은 성장을 발견하는 기쁨, 그 뿌듯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아의 고단함을 견뎌내는 힘이 되게 한다는 것.
엄마를 통해서 전해듣는 것에만 익숙해진 아빠들이 스스로 직접 겪고 느낄수록
육아의 보람과 의욕은 더해진다는 걸,
아이들이 훌쩍 커버리기 전에 더 많이 겪어봤으면 좋겠다.
4월은 우리 두 아이들의 아빠, 남편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아이들과 함께 외출한 남편의 생일케잌을 만들며 지난 14년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본다.
이쁘고 똑똑한 아이와 돈 잘버는 멋진 아빠, 미인에다 교양있는 엄마로 이루어진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다.
이만큼 살아보니, 가족이란 게 그런 그림같은 모습이기도 어렵고 꼭 그렇게 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른 남과 남이 만나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그럭저럭 원만한
가정을 꾸린다는게 얼마나 어렵고도 복잡한 과정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막연하게나마 꿈꾸던 단란한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라해도
우리 네 식구가 서로에게 무척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잘나고 능력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셀 수도 없이 좌절해야 할 만큼
남편과 나, 우리 두 아이들은 평범하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서로 눈치보고 경쟁해야하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우리 넷만은 서로의 평범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여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평범한 부모, 평범한 아이라도 괜찮아 - 하며 안심할 수 있는 우리집이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티격태격하겠지만, 우리 부부의 힘으로 이 세상 한 켠에
그런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지 않고
행복하게 어른이 되는 순간을 맞을 수 있도록 한다면,
이 지루하고 고단한 육아의 나날이 좀 더 의미있어지지 않을까?
남편은 가끔 나와 싸울 때, 너무너무 화가 났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밖에서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 지 알아??"
... 내가 육아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지나고 있을 때, 그도 일터에서 그랬을 것이다.
지난 14년동안 내가 겪은 어려움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남편도 내성적이고
쉽게 상처받는 성격으로 거친 사회를 맨몸으로 겪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에게 이제 부탁하고 싶다.
그토록 힘들게 세상과 부딪혀온 오랜 경험을, 아이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냥 참고 견디며 속으로 쌓으면서 술로만 풀지 말고,
그동안 자신이 만나온 세상을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며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험하고 거친 사회에서 묵묵히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아이들에게 충분히 슈퍼맨 자격이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동안은 가족 나들이나 외식을 해도 늘 아이들이 중심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 아이들이 먹기 편한 음식을 위주로 찾아다녔다.
이제 둘째도 좀 컸으니, 올해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도 가끔 먹으러 갈까.
회덮밥과 시저 샐러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지난 14년동안 이런 음식을 먹으러 간 게
손에 꼽을만 한 걸 보면 아빠가 그동안 참 소외되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가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서 골고루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올해는 노력해 봐야 겠다.
다만 딱 한 가지, 남편에게 부탁이 있는데
<슈퍼맨이 돌아왔다> 엄마들처럼, 가끔 나 혼자만의 시간만 갖게 해 준다면
나, 더 잘 할 수 있는데..
여보!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당신은 잘 할 수 있어요! 우리 가족만의 슈퍼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