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온 뒤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한 딸은 태어난 다음날 수술장으로 옮겨졌다. 딸은 아빠 엄마의 힘내라는 응원을 들으며 수술대에 올랐다. 아내를 병실로 올려보내고 나 혼자 보호자 대기실에 남아 전광판에 있는 ‘송○○ 아기’가 ‘수술중’에서 ‘회복중’으로 바뀌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제 썼던 동의서 내용과 의사에게 들었던 수술 절차를 곱씹으면서, 수술만 잘 되면 정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아이로 키우겠다고 여러번 다짐했건만,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한시간쯤 흘렀을까? ‘송○○ 아기 보호자분’을 찾는 방송에 수술장 문 앞으로 가니, 수술을 집도한 교수가 직접 나와 수술 경과를 설명해줬다.
“수술 잘 됐어요.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는데 수술은 잘 마쳤으니까. 회복 잘하면 될 것 같아요”
살았구나.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병실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한시간이 더 지난 뒤, 중환자실에서 딸을 만났다. 배를 열고 오장육부를 제 위치로 돌려놓은 수술을 받은 신생아치곤, 평온한 표정이었다. 쌔근쌔근 거칠게 숨을 쉬며 잠을 자고 있는 아이에게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곤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음날 아내가 퇴원하면서 아이는 온전히 병원에 맡겨졌다. 하루 여러번씩 딸을 봤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중환자실의 면회는 하루 두 번, 낮 1시와 저녁 7시로 제한돼있었다. 산후조리중인 아내가 면회에 매번 가진 못했기 때문에, 하루 한번씩은 나 혼자 병원에 가야했다. 딸에게 안좋은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혼자 병원에 갈땐 딸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보단 걱정에 잡생각이 보태져 늘 발걸음이 무거웠다. 면회시간 10분 전부터 중환자실 문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여러번 나왔다.
면회를 하려면 손을 소독해야되는데, 아직도 소독약의 알큰한 냄새가 코에 남아있는 듯 생생하다
수술이 잘 돼도, 보통 회복하는데 보름에서 한달이 걸린다고 했고, 길게는 6개월만에 퇴원했던 아이도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내와 난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 여러번 다짐했다. 괜히 하루하루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차근차근 회복하기를 기다리자고, 면회가 끝날 때마다 아내와 약속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먹기는 참 쉽지 않았다. 틀린그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면회 때만 되면 주치의와 간호사에게 혹시 이전보다 나빠진 점은 없는지, 좋아진 점은 무엇인지를 취재하듯 따져 물었다.
내가 병원을 오가는 동안 아내는 집에서 유축기와의 사투를 벌였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어야 모유도 잘 나온다고 하는데, 하루에 길어봐야 30분을 보는 아내는 모유가 잘 돌지 않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도 반드시 모유를 먹이겠노라는 아내는 굳은 의지로 매일 밤낮으로 유축을 했고, 몇방울씩 모인 모유를 정성스레 포장해 냉동실에 얼렸다. 가끔 실수로 조금이라도 흘릴 때면 아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내가 열심히 마련한 모유는 내가 매일 면회 때마다 신주단지 모시듯 병원으로 배달했다.
이런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알았던 것일까. 다행히 딸은 빠른 속도로 회복돼 면회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또 그동안 미뤄뒀던 ‘신생아의 감동’을 아빠 엄마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수술 이후 수술 부위가 덧날까봐 맞았던 수면제는 태어난지 사흘 만에 투여가 중단됐고, 그때서야 긴 잠에서 깨어나 까만 눈동자를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다. 8일째엔 한가로이 모빌을 감상하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여줬다. 이때는 기도에 관을 삽입해 호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딸은 울어도 소리를 못냈고,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비틀어 자신이 울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선, 자동으로 회전하는 모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딸의 표정은 마치, “아빠, 나 괜찮으니까 걱정마. 생각보다 별로 안 아파. 신경 안써도 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퇴원하기 바로 전날. 잠을 자고 있는 딸의 모습.
9일째부터 금식이 풀려 코로 모유를 먹기 시작했다. 10일째엔 인공호흡기를 떼 처음으로 호스 등으로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온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2일째엔 아빠에게 처음으로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려줬다. 13일째엔 직접 수유를 해보는 영광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기저귀만 찼던 아이의 몸에 신생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속싸개’를 둘렀다. 14일째 딸에게 연결돼있던 모든 관이 제거됐고, 주치의가 곧 퇴원할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하라는 말을 전해줬다.
그리고 태어난지 16일째인 2013년 10월9일, 드디어 딸은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이제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으니, 다른 아이들이랑 똑같이 키우면 된다"는 의사 의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퇴원 한달 뒤엔 우리 딸을 일컬어 ‘이렇게만 회복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모범생’이라고 했는데, 이역시도 우리 딸이 무슨 상이라도 탄 것처럼 마냥 기뻤다.
161일이 지난 지금, 딸은 잘 자라고 있다. 2.98㎏였던 몸무게는 7.5㎏로 늘었고, 아래 잇몸엔 이빨 두 개가 귀엽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정성스레 만들어준 쌀미음도 숟가락으로 잘 받아먹고, 얼마전 사준 매트위에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배밀기에 열심이다. 훈장처럼 남은 왼쪽 갈비뼈 밑에 깊게 파인 흉터만 아니라면, 아이가 언제 아팠을까 할 정도로 잘 자라고 있다. 이 16일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위로가 “잘 될거다.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다”라는 것이었는데,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다. 딸보다 훨씬 오랜시간 병원에 있었던 아이도, 더 아픈 아이도 있었을 텐데, 이리도 호들갑을 떨었나 하는 생각에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건, 16일의 짧지만 길었던 딸의 병원 생활과 그 이후의 시간들이 딸의 폭풍 성장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를 분명히 성장하게 했다는 점이다. 딸이 생사를 다투면서 생명의 소중함이 이런건가 라고 느끼게 됐고, 정신을 똑바로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책임감도 생겼다. 함께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아내의 소중함과 더불어, 부모 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되짚어보면서 내가 제멋대로 살면서 부모님이 느꼈을 괘씸함도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리고 아이의 건강을 빌어준 주변사람들의 격려와 위로 속에서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식상한 진리도 가깝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저 작은 핏덩이도 이렇게 대견하게 힘든 난관을 극복하고 잘 살고 있는데, 부모된 내가 못할게 무엇이 있겠냐는 그런 용기도 불어넣어 줬다. 그렇게 딸은 철없던 나를 조금씩 자라게 하고 있다.
퇴원해서 100일까지 딸의 모습들. 만들어 놓고보니 별로 안 큰 것같기도 하다 :)
나중에 딸에게 네 덕분에 아빠도 이만큼 컸노라고 보여주기 위해 쓰기로 마음먹은 이 육아일기는 뭐라 규정하기 힘든 부담감 때문에 한밤중에 깬 아이 달래기만큼이나 힘든 미션이 됐다. 세 번째 글이 이렇게 늦은 것은 이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앞으로 딸과의 소중한 추억을 차곡차곡 담아, 꾹꾹 눌러쓰겠다고 다시금 다짐하고 있다.
이미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격려와 위로를 보내주셨던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뒤늦게 드린다. 앞으로 서툴고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시길. 그리고 서툴고 부족한 아빠에게도 많은 격려 보내주시길. 소중한 우리딸 서진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