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저러한 집안 사정으로 나의 유년기는 주로 할아버지와 함께한 시기였다. 많은 아이들의 손에 부모님 손이 잡혀있던 5~8살 무렵, 내 손엔 할아버지 손이 잡혀 있었다.
김12ae.jpg
매일같이 산보를 나갈 때가 그랬다. 물통 수레를 끌고서 동네 뒷산 약수터를 향하는 할아버지의 느릿한 걸음을 따라 나는 잰걸음을 종종거렸다. 동네 놀이터에 갈 때도, 목욕탕·이발소에 갈 때도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등하굣길도 늘 그랬다. 밤잠을 청하면서도 할아버지한테 꼭 붙어 있었다.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때였을까, 잠결에 할아버지 가슴을 만지며 잠들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술·담배를 즐기셨지만 건강하고, 또 근면하셨다. 아이 하나 돌보는 것 정도는 너끈히 해내실 만했다. 끼니도 문제가 없었다. 젊을 때 유학하면서 자취 생활을 오래 한 덕인지, 혼자서도 밥상을 척척 차리셨다. 할머니 계실 땐 그럴 일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외출하면, 할아버지가 손수 차린 밥상 앞에 둘이 앉곤 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손잡은 팔을 흔들며 내가 신나게 부르던 노래를, 할아버지는 따라 부르지 못하셨다. 맨손체조로 체력은 단련됐지만, 스포츠에 능한 분은 아니셨다. 내가 공놀이가 하고 싶을 때 할아버지는 먼 발치서 바라만 보셨다. 나는 혼자서 형·누나들 주위를 쭈뼛거리다 물러서기 일쑤였다. 집에서 멀지 않은 해수욕장에서 처음으로 헤엄치는 데 성공했을 때, 할아버지는 백사장에 앉아 신문을 읽고 계셨다. 집에 가는 길에 아무리 자랑을 해도 시큰둥하셨다.

나는 내성적이었지만, 얌전하지만은 않은 아이였다. 뒷산에서 벌집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된통 쏘인 뒤 혼절한 적이 있었다. 깨어나보니 어두운 방안에 호랑이연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곁에서 내 온몸을 주무르던 할아버지가 ‘일어났나’하며 반기셨다. 동네 친구들이 함께 놀다가 나의 장난질에 여자아이가 얼굴에 상처를 입은 일이 있었다. 그 집 아줌마가 따지러 왔을 때, 할아버지는 며느리뻘 되는 이에게 용서를 구하며 몸둘 바를 몰라 하셨다.

그 무렵 할아버지가 몸소 나를 가르치셨던 기억은 없다. 몇 년 뒤에는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쳐주셨지만, 그땐 아직 너무 어렸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따라간 곳은 ‘비교육적’이기 일쑤였다. 저녁마다 할아버지를 찾아오라는 할머니의 성화에, 난 ‘할배요~’ 하며 동네 식당 몇 곳을 돌아다녔다. 해거름에 할아버지와 간소한 석양주를 나누던 아저씨들은 으레 나더러 이리 와 잠깐 앉으라 했지만, 나는 그 말을 한귀로 흘리며 할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직장을 은퇴하고 시장에 작은 가게를 내신 할아버지는TV를 많이 보셨다. 귀가 어두우셔서 온 집안이 쩌렁댈 정도로 볼륨을 키워야 했다. 군 출신 독재자였던 대통령이 나오면 혀를 차며 욕을 하셨다. 저녁 9시 땡 소리와 함께 늘 등장하는 그가 싫어서 9시 10분쯤에야 뉴스를 켜셨다. 어린이 프로그램이 드물었던 시절, 잠결에 보았던 뉴스 몇 꼭지는 할아버지의 반응과 더불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근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육아를 맡는 경우가 늘면서, 양육기관이 부모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요즘식 육아에 능한 조부모도 많아졌다고 한다. 세살배기 아들을 둔 한 친구는 “학부모 모임에 가면, 세련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질문이나 배경지식이 웬만한 젊은 엄마들보다 훨씬 낫더라”고 했다. 다른 한편으론, 불가피하게 할아버지·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겨놓고 육아 방식의 차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엄마들의 존재도 엄연한 현실이다. 손녀가 다니는 영어유치원의 통지문을 읽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할머니의 등장은, 그 두 현실이 복합된 결과다.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은, 그것이 어떤 일상이었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귀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빠였건 엄마였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똑똑한 할머니를 부러워할 필요도, 영민한 엄마들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찬바람이 불고, 연인을 위한 초콜릿이 거리에 깔리자, 일곱해 전 이맘 때 영면하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4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태그
첨부
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이메일 : oscar@hani.co.kr      
블로그 : http://plug.hani.co.kr/oscar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147174/beb/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1005 [박태우 기자의 아빠도 자란다] 아기의 16일간 사투 그리고 그후 161일 imagefile [18] 박태우 2014-03-04 20103
1004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새봄, 새학기 준비는 바른 수면습관부터 imagefile [13] 윤영희 2014-03-02 14340
1003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내 없는 일주일, 외식 외식 외식.... imagefile 홍창욱 2014-03-01 18889
1002 [최형주의 젖 이야기] 푸우우우~~~ imagefile [2] 최형주 2014-02-27 12044
1001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언니 때문에 막내는 열공 중 imagefile 신순화 2014-02-26 17873
1000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500원짜리 가방 들고 둘째는 학교에 간다네!! imagefile [2] 신순화 2014-02-26 12032
999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밥보다 변신로봇, 엄마의 무한도전 imagefile [10] 양선아 2014-02-26 16498
998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34편] 워킹맘, 새벽에 김밥말고 출근한다네~ imagefile [1] 지호엄마 2014-02-25 11617
997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폭풍육아중인 부모에게 집밥은, 탄수화물 그 이상의 것 imagefile [5] 윤영희 2014-02-24 12784
996 [최형주의 젖 이야기] 젖 맛, 손 맛 imagefile [1] 최형주 2014-02-20 27218
995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33편] 왜 이제야 나타난거야? 베이비트리 앱 imagefile [1] 지호엄마 2014-02-20 110780
99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눈 내린 그곳에 아버님 혼자 계셨다 imagefile [3] 신순화 2014-02-18 25231
993 [엄마 귀는 팔랑팔랑, 이거 살까 말까] 8화. 유아 겸용 변기 커버 imagefile [3] 팔랑팔랑 2014-02-18 15666
992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내 없이 살아가기1 imagefile 홍창욱 2014-02-18 19586
991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육아 공감 선물 imagefile [7] 윤영희 2014-02-16 22819
990 [박태우 기자의 아빠도 자란다] 세상으로의 첫 여행, 곧바로 중환자실로 imagefile [3] 박태우 2014-02-12 31217
989 [박태우 기자의 아빠도 자란다] 확률 1/10만 희귀병, 뱃속 아기가 아팠다 imagefile [3] 박태우 2014-02-12 25833
» [김외현 기자의 21세기 신남성] 할배요~ imagefile [1] 김외현 2014-02-11 13092
987 [사진찍는 엄마의 길 위의 생각] 스위스 산골 아이처럼 imagefile [2] 빈진향 2014-02-11 18032
986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이 집 나갔다, 얼쑤 신난다!! imagefile [10] 신순화 2014-02-11 23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