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극장에서 ‘겨울 왕국’을 봤다. 함박눈이 내리는 영화 속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3D로 보니 눈송이가 내 어깨 위에 슬며시 내려앉을 것처럼 느껴졌다. 와, 진짜 눈 같아! 아이들도 신기하다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하얀 눈 뒤덮인 산, 얼음 왕국,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스위스 융프라우, 십 년 전 그곳을 여행할 때 라우터브루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며칠 묵었다.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민박집에서 하릴없이 창가를 서성이며 밖을 내다보는데 멀리서 그 집 아이가 점심 먹으러 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두텁게 쌓인 새하얀 눈밭으로 고꾸라졌다. ‘어머, 어떡해?’ 발을 헛디뎌 넘어진 줄 알고 걱정했는데 배시시 웃으며 일어서더니 다시 눈 더미에 몸을 던졌다. 눈 속에 파묻혀 막 뒹굴다가 눈을 뭉치고 허공에 뿌리고 한 움큼 입속에 털어 넣었다. 아이는 온몸으로 눈과 하나가 되어 구르고 있었다.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 하늘, 공기, 온 세상이 한데 뒤엉켜 아이에게로 촘촘히 박히는 듯 했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구경을 갔다. 학생이 서른 명 남짓 되는 아주 작은 학교에 교실 한 칸이 목공 작업실이었다.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 작업대, 그리고 벽에는 다양한 공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지금까지도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한, 이름도, 쓰임새도 알지 못하는 도구들로 가득했다.
초등학생들이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물건을 만든다니, 조금 날카로운 칼을 잡기만 해도 위험해서 큰일 나는 줄 알고 자란 나로서는 몹시 놀라웠다. 이곳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나무 다루는 기술을 익힌단다.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옆에서 도와주면 어린아이도 해낼 수 있다고.
자신의 손끝에서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얼마나 멋진 경험인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손으로 짓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자연과 사물의 귀함을 깨닫게 되리라.
융프라우는 잘 알려진 대로 아름다웠다. 산기슭에서 이 멋진 풍경을 품고 자라는 아이의 모습은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아이를 낳으면 자연과 가까이 살게 하리라, 그때의 다짐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늘 마음에 두고 산다. 아이들에게 진짜 칼을 쥐어주고 원하는 걸 덥석 사주기보다 같이 만들어 보려 애쓴다.
영화 속 장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만, 눈으로만 즐기고 사라져버리는 가짜 눈은 아무래도 아쉽다. ‘같이 눈사람 만들래?’ 영화 주제곡을 듣고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이 겨울 가기 전에 함박눈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잔뜩 움츠렸던 몸과 마음 쭈욱 펴고 아이들과 신 나게 놀아 보리라. 거리낌 없이 온몸을 내던져, 그때 그 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