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울 즈음, 몸이 좋지않아 병원에 출근 도장찍듯 자주 들락거렸다.

적혈구가 부족해서 빈혈 수치가 너무 낮은 탓에

시도때도 없이 피로가 몰려오고, 무엇보다 추위를 심하게 탔다.

저녁에 아이들 밥만 차려주고는 뜨뜻한 곳에 담요를 몇 장이이나 덮고 누워도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아침마다 둘째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줄 때는

몸이 눈사람처럼 될만큼 옷을 껴입고 마스크에 장갑까지 무장을 하고도 부들부들 떨렸다.


나의 체질과는 도저히 맞지 않아 임신 때도 먹기가 힘들었던 철분약을 몇 주간 먹고난 뒤,

피검사를 다시 한 결과, 수치가 좀 높아져서 피로와 어지럼증이 다행히도 많이 나았다.

담당의사와는 몇 달 뒤, 다시 검사를 하고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지만

속이 메쓱거리고 복통과 설사까지 동반되는 철분약은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어

당분간 철분이 풍부한 식사와 운동으로, 둘째를 키우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몸을

좀 더 챙기기로 했다. 마침, 겨울방학이 되었고 두 아이만 집에 두고도 1시간 정도는

혼자 밖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 중에 하나는 걷기인데,

시간이나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적당한 운동이다.

가벼운 겨울옷을 입고 집 현관을 나온 순간부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아침이냐 저녁이냐에 따라 걷는 코스도 다르게 정해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는

2,3시간이나 걸은 적도 있는데 걸을수록 힘이 들기보다 다리 근육이 단련되어 더 걷기가

수월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둘째 낳고 진짜 오랫만에 느껴보는 이 기분!


차갑지만 상쾌한 겨울 공기가 시원하게 뼛속까지 스며들고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게 무척 기분 좋았다.

연말과 연초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제법 오랫동안 걷는 운동을 했는데

겨울해가 지는 저녁, 강가를 걸으면서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에 대한 다짐도 정리해 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일본에는 아직 아파트보다 주택 거주자가 더 많아

아담한 주택가 골목을 지날 때는 집집마다 다른 대문풍경이나 소박하고 이쁜 화분들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우리집 마당도 저렇게 해보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내일은 또 다른 골목으로 코스를 정해 걸어봐야지! 하는 의욕도 생기고.


빠르게 걸으며 스쳐지나는 길가에서 눈과 마음에 거슬리는 곳과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가끔 이쁜 집과 가게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들을 만날 때마다,

아! 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빵과 케잌을 파는 오래된 가게가 있는데, 가게 옆에 손님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쉴 수 있게 만들어둔 공간이 내겐 참 이뻐 보였다.

한참을 걷다가 좀 지칠 때 이곳에 들러 앉아 가끔 쉬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DSCN2504.JPG

식물이 가득한 화단과 오래된 화분들, 길 양쪽에 끼인 푸른 이끼마저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간의 세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했다. 나무 벤치에 앉아있으면 뒤쪽 빵가게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들에 또 한번  햐..! 하고 황홀한 감탄사가..
세상살기가 끝도 한도 없이 거칠고 사나워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해도 되는 순간과 공간이 있다면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을까?
작지만 편안하고 따뜻한 쉼터같은 공간을 좀 더 많이 만드는 것.
차츰 더 넓은 세상과 만나가는 아이들에게도 가정이 그런 공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잘 키워야한다는 스트레스에 가끔은 피로해지는 우리 부모들에게도 그런 쉼터가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들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한달이 채 되지 않았고, 걷기운동을 못 나가는 날도 많지만
육아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엄마의 몸이 건강해야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엄마의 몸과 마음과 정신의 근육이 좀 더 단련될 때,
아이와 일상에 이끌려가지만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꾸려갈 수 있다.
2014년 육아 근육은 걷기 운동으로 단련하자!
마라톤은 자신없지만, 최고 몇 킬로까지 걸을 수 있을지 목표를 정하고 도전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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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함께 또 하나, 올해의 육아를 위해 단련하고 싶은 건 글쓰기.
건강을  돌보게 되면서 몇 해 전에 읽었던 고미숙 님의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몸과 마음, 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글쓰기가 여성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정말 속이 시원하게 설명한 멋진 책이다.


글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성찰과 수렴 능력을 키우는 데는 최고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귀족들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왜 문장력으로 인재를 선발했는가를 환기해 보라.

언어를 창조하고 조직하는 능력 없이 지성의 근육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435쪽)


자기만의 육아 내공을 쌓으려면

육아책 읽기보다 글쓰기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다.

고미숙의 <동의보감>에서 "삶과 세계를 언어로 구조화할 수 없다면 아직 지성의 주체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육아를 할 때도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육아를 언어로 구조화하는 힘,

즉 글쓰기로 단련하는 힘이 실제 육아에 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글쓰기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이의 글을 읽고 평가하기는 쉽지만, 막상 스스로 써보려하면 막막해지는 때가 많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런 게 아니었는데..'싶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포기하기 일쑤고

때로는 만족스럽고 신선하다 싶었던 나의 글이,

어느 순간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처럼 느껴져 괴로울 때도 많다.

의뢰받은 원고가 마감 날짜는 코 앞인데, 글이 뜻대로 안 써지던 어느날,

고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아, 글쓰기가 이런 거구나!하고 깨달음과 위로를 얻은 순간이 있다.


"선생님같은 대가는 한 두 시간이면 쓰실 수 있잖아요."하는데,

그럴 때마다 야속한 생각이 들고 속으로는 뭐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적절한 한마디 말을 찾아 온종일 헤맬 때도 있다는 겁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한 마디를

찾아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찾아내야 하는 것은 그게 있어야 작품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평생 글을 쓰신 작가분도 이러한데, 나 같은 사람이 헤매는 건 당연한 거구나.

더 헤매고 찾는 시간이 필요한 거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동안이 글쓰기에 참 유리한 건, 힘들고 위기의 순간을 자주 겪다보니

아기 기저귀를 갈다가, 졸면서 젖을 먹이다가, 지친 몸으로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다가,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를 듣다가 ...

글에 필요한  그 "딱 한 마디"가 떠오르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10년 동안이 삶의 이야기가 가장 풍성할 때다.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싶고, 올해는 더 부지런히 글쓰기로 단련해 보고 싶다.


DSCN2518.JPG

고미숙은 우리시대 여성들이 글쓰기를 통해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를 권한다.

배움은 곧 타자와의 능동적인 접속이자 삶의 현장에 적극 개입하는 실천적 행위다.
그 행위들이 교양과 정보의 지리한 나열에 그치지 않으려면
글쓰기를 통해 지성의 수위를 높여 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는 결코 치유의 과정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 치유란 평균적 삶을 누리는 데서 끝난다.
평균적 삶이란 바로 중산층의 단란한 가정이라는 환타지,
즉 다시금 '오이디푸스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란 그런 식의 치유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해 갈 수 있는 능동적 단련을 의미한다.
자기수련으로서의 글쓰기, 자기구원으로서의 앎!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가 기다렸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 (동의보감 / 421쪽)

육아를 시작한 지 올해로 12년 째,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육아와 삶이 어떤 것인지.
훌륭한 육아서적들과 유명한 육아 멘토들의 말과 조언보다 더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부모인 나의 내면의 목소리와 지금 내 곁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새로운 삶과 교육, 그리고 변화를 원한다면 그 주인공은
'뛰어난 누군가'나 '주변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우리가 기다렸던 사람은 바로 우리라니!  너무나 멋진 말이다.
2014년 새해는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다.
두 아이들이 자라는 이야기를 세월에 어영부영 흘려보내지 않고 잘 붙잡아 쓰고 싶다.
걷기와 글쓰기, 이 두 가지만 잘 해도 올 한 해는 뿌듯할 것 같다.
즐기면서 그저 꾸준하게 걷고 쓸 것이다.
그렇게 새해엔 좀 더 탄력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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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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